작년 말 미국 대통령 부시가 이라크에서 중동 기자가 던진 구두 세례를 받는 장면은 많은 패러디의 원조가 된 인기 동영상이었다. 이슬람에서는 신발로 밟거나 벗어 던지는 것이 남을 모욕주는 최대의 행위라는 것을 전 세계가 알게 된 것도 이를 통해서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한 가장 보편적인 모욕은 단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일 것이다. 침은 가장 즉각적이고 간편한 수단이다. 거기다가 예수가 "누가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어주라"고 가르친 것도 이를 완곡하게 표현했을 뿐, 상대방이 받는 모욕감의 정도는 차라리 뺨을 맞는 편이 낫다고 할 정도로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침뱉기를 얘기할 때 중국을 빼놓을 수 없다. 아무데나 늘상 침을 뱉는 것이 문화가 되다보니 침뱉는 그릇(唾壺)이 필수품으로 중시되고, 상류 사대부가 은판사진을 찍을 때 찻잔, 담뱃대와 함께 반드시 갖춰야 하는 완상품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영문도 모른 채 귀한 중국 문물로 수입돼 당타구(唐唾具)라 불렸고, 얼마 전까지도 병원과 이발소에서 흰 도자기 타구를 볼 수 있었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는 침뱉기를 '없애야 할 4대 폐해(新四害)'의 하나로 지목해 휴대용 침봉투와 침 파파라치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혹자는 중국인의 침뱉기문화가 중국 북방의 메마르고 먼지 많은 기후 조건으로 인한 불가피한 생리현상이라고 두둔하기도 하는데, 그 연원은 상당히 오랜 것 같다.

중국 역사에서 모욕을 견딘 유명한 사례로는 한(漢) 초의 명장 한신(韓信)이 동네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던 사건을 치지만, 모욕에 대처하는 구극의 경지를 보여준 것은 루사덕(婁師德)을 꼽아야 할 것이다. 루사덕은 7세기 말 당(唐)제국의 깃발을 잠시 내리고 대주(大周)를 세워 여황제로 군림한 무후(武后, 측천무후)의 재상이다.

루사덕은 어릴 적 꿈에 명부(冥府)에 가서 자기 수명이 팔십이고 재상이 될 것이라는 천기를 봤지만 실제로는 일흔살에 죽어 일화를 남긴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임종 때 "누가 내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30년 고관 생활하면서 오판으로 두 사람을 죽인 일이 있는데 이 때문에 수명이 10년 짧아졌다"고 말한 뒤 기절했다고 한다.

사덕의 동생이 대주(代州) 장관에 임명됐다. 임지로 떠나는 동생에게 사덕이 물었다.

" 내가 재주가 없는 데도 재상자리에 있는데 너까지 장관이 됐다. 우리 형제가 분이 넘친다고 사람들이 미워할 터인데, 어떻게 몸을 보전할 생각이냐?"

"앞으로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자가 있어도 그저 묵묵히 닦을 각오이니, 형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침을 뱉는 것은 그 사람이 네게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냐. 그런데 면전에서 침을 닦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거슬러서 화를 더욱 북돋는 것이다. 침이란 것은 닦지 않아도 저절로 마르는 것이니, 그냥 웃으면서 받으려무나(唾不拭將自乾,何若笑而受之)." <수당가화(隋唐嘉話)>

요새 세상살이가 팍팍해진 탓인지 여러 가지로 열받고 화나는 일이 많아서 신경과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는다는 소식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힘있는 사람은 힘을 과시해 보고 싶은 유혹을 더 받고, 그럴수록 보통사람의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이런 스트레스의 으뜸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모욕이라는데, 좀 긴 안목으로 보면 차라리 웃으며 야유라도 해주고 싶은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는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악의나 잔혹함에 분개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없지만,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세상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양식(良識)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법>

굳었던 뺨이 당장 풀리며 빙긋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가?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