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 졸업장이 全유럽 '취업 보증수표' …교육통합 이끈다

EU, 2010년까지 대학 시스템 단일화
기존틀 벗고 세계적 트렌드로 탈바꿈
교육품질 보증하는'국가인증제'도입
해외 대학생 유치 등 변화.개혁 추진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항구도시 앤트워프.중세 고딕건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거리 곳곳에 'EAIE 2008 앤트워프'란 깃발이 펄럭인다. 다름아닌 '유럽국제교육협회(EAIE.European Association for International Education)'의 정기 컨퍼런스를 알리는 깃발이다. EAIE 컨퍼런스는 유럽의 대학 국제화 관계자들이 매년 개최하는 국제화 '올림픽'으로 불린다. 자전거로 아침 출근길을 재촉하는 현지인들 사이로 EAIE 로고가 새겨진 가방을 멘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행사가 열리는 앤트워프 대학에는 3000여명이 내뿜는 열기가 후끈하다.



지난달 12일 열린 EAIE 컨퍼런스에서 관심은 단연 유럽 대학들을 통합하기 위한 '볼로냐 프로세스(Bologna Process)'의 추진 상황이었다. 볼로냐 프로세스 워킹그룹의 바바라 웨이트그루버 대표는 "볼로냐 프로세스의 핵심이라 할 학위 시스템 구축에 대한 심사 결과 탈락하는 국가가 한곳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선언,행사장은 환호와 박수로 요란했다.

볼로냐 프로세스는 유럽 대학교육 통합을 목표로 1999년 출범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4개 유럽연합(EU) 소속 국가들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모여 2010년까지 단일한 대학 제도를 설립,유럽 대학들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자며 만든 프로그램이다. EU에 속하지 않은 국가들도 참여해 회원 수가 47개국으로 늘었다. 프로그램 완성 목표 연도는 2010년.이때가 되면 유럽 지역 안에서는 대학 졸업장 하나로 모든 나라를 넘나들게 된다. 예컨대 체코 프라하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영국에서 영국대학을 졸업한 것과 같은 학사 학위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 마치 유로화처럼 말이다. 유럽 어느 대학을 나오든 유럽 국가에서는 어디에서나 '취업 보증 수표'를 얻는 셈이다.

유럽 대학들은 그동안 꼬장꼬장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자신만의 전통을 고집해 왔다. 그렇지만 갈수록 한계가 뚜렷해졌다. 유학생들은 유럽보다는 미국대학으로 몰리고 있다. 그에 따라 교수 및 석학들도 미국 대학에 둥지를 트는 추세다. 이 상태로는 고사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유럽대학들이 과감히 기존의 틀을 벗어던지고 나선 것이 볼로냐 프로세스다.



이를 위해 유럽 대학들은 학위제도부터 손질했다. 이전까지 유럽 대학들은 학사와 석사 과정을 통합해 배우는 '마스터 제도'를 운영해 왔다. 미국식 학사.석사.박사 제도와는 달랐다. 볼로냐 프로세스는 미국식으로 학제를 개편했다. 우선 3∼4년 만에 학사학위를 받아 직업세계에 뛰어들 수 있도록 했다. 추가적인 연구는 석사와 박사 학위 과정을 밟도록 하는 3단계 시스템을 구축키로 했다. 2007년 말 현재 참가국 대학의 82%가 학위 제도를 학사.석사.박사 과정으로 전환했다.

대학 교육의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 '국가인증제도'를 도입키로 한 것도 볼로냐 프로세스의 핵심이다. 대학 통합이 가능하려면 모든 대학들이 일정 수준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그러자면 국가 차원에서 대학 교육의 질을 관리하는 게 필수적이란 판단에서다. 작년까지 대학 교육 인증 시스템을 마련한 나라는 47개국 가운데 41개국에 달했다. 안드레스 라흐반제스 EAIE 평가관리팀장은 "대학 교육 수준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여야 A국가의 졸업장이 B국가에서도 통할 수 있다"며 "이때서야 비로소 학생 및 교수가 다른 유럽 국가의 대학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스탠더드 도입으로 학생 유치에 성공한 오스트리아의 사례는 EAIE 컨퍼런스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오스트리아는 2년 전부터 교육으로 얻는 수입이 관광 수입을 추월했다. 데이비드 스톡클린 오스트리아 라트로브대 교수는 "대학들이 유학생 유치를 통해 버는 수입이 관광 수입보다 많다"며 "정부가 대학에 지원하는 재정금을 줄이면서 대학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나선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글로벌 랭킹 100위 안에 드는 라트로브대의 경우 전 세계 200개 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었다"며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학비와 생활비가 저렴한 데다 국가인증제의 조기 도입으로 대학의 질을 높인 것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올해 컨퍼런스 참가자들이 꼽은 유럽 대학들의 가장 큰 변화는 오스트리아처럼 교육을 상품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유럽 대학들은 전에는 교육을 상품으로 보지 않았다. 지금은 소비자인 학생을 대상으로 질 좋은 상품(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대학과 교수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호주 디킨대학의 할리드 러브그리브 국제교육 담당자는 "과거 유럽대학들은 유학생들에게 공짜로 교육을 실시했지만 최근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며 "이제는 해외 유학생들을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독일 괴테대학에서 온 우트 란젠도프 교수는 "최근 독일 대학들은 해외에 교육 커리큘럼을 수출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이를 위해 해외 캠퍼스 설치에도 적극적"이라고 설명했다.

EAIE 컨퍼런스 공식 행사가 끝난 오후 5시.참가자들은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새로운 네트워크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중에는 '아시아판 EAIE'인 아시아태평양국제교육협회(APAIE) 이두희 회장(고려대 교수)의 모습도 보였다. 이 교수는 "아시아와 유럽 대학 간 교류를 촉진하는 '에라스무스 문두스 프로그램'의 조속한 출범을 EAIE 측과 논의했다"며 "유럽대학들이 실질적으로 하나로 통합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창조적 인재를 기르기 위해 유럽은 지금 대학도 하나로 만들어 가는 중이다.

앤트워프(벨기에)=성선화 기자 d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