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시인ㆍ명지대 교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어릴 적 이발소에서 봤던 이 문장이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모른다. '뿌시낀'이라고 쓰여 있었던가. 이 문장을 처음 봤던 곳은 내가 자랐던 소읍의 이발소에서였다.

"엄마가 머리 자르고 오래요"라며 막내 오빠를 따라 들어서면,흰 셔츠를 차려입은 이발소 아저씨는 꼭 오빠부터 잘라줬다. 잘랐다기보다는 밀어줬다. 사각사각 바리캉이 지나가고 나면,베어낸 '나락 끌텅' 같은 푸르스름한 머릿속이 드러나곤 했다.

세로의 예서체로 쓰인 이 문장을 오빠 머리가 점점 푸르스름해지는 사이 읽고 또 읽었다. 초록색의 이발소 비닐의자와 흰 타일과 세면대,온갖 이발도구들,아버지에게서 나던 '포마드' 냄새와 라디오의 음악들,울긋불긋한 장식품들,그 낯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멀미 속에서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예닐곱 살의 나는 '삶'이나 '노하거나' 따위의 말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삶이 그대를 속인다'는 말은 더더구나 수수께끼였다. 그런데도 그 문장은 내게 묘한 울렁임을 주었다. 그 말을 읽고 또 읽노라면 문득 두 손에 힘이 가고 명치끝에서 뜨뜻한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 문장이 그곳에 그렇게 걸려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뜻을 이해했던 게 분명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삶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삶에 속고 있는지.지금 생각해보면,가난하고 척박했던 1970년대 초 소읍의 한 이발소에 걸려 있던 그 문장은 어린 나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 그리하여 이 문장은 삶에 속고,삶에 속을 그때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고 희망을 주었던 것인지.

"얘들아,신발 작아 발 아프다는데 못 사줘 미안해"라는 유서를 남기고 젊은 엄마가 스스로 목을 맸다는 얼마 전의 기사 때문이 이 문장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과 이혼한 후 식당일을 하며 일곱 살과 다섯 살짜리 두 아들을 키우던 '겨우' 스물일곱 살의 주부였다고 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에 관한 뉴스들을 보고 듣는 게 겁이 나는 즈음이다. 기록경신이라도 하듯 자고 나면 폭락과 폭등,폐업과 파산,불황과 부도,위기와 도산,구조조정과 실업 기사들이 도배를 하고 있다. 광우병에,멜라민에,조류독감은 또 어떤가. 인터넷을 비롯해 사회 전반에 도청과 감시와 규제와 통제가 옥죄어오고 있다. 월급봉투 앞에서도,식탁 앞에서도,인터넷 앞에서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날들이다.

이발소에서 봤던 '뿌시낀'의 그 문장은,훗날 이렇게 완성되고 있었다.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기쁨의 날이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현재는 슬픈 것/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지나가는 것이니/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가장 통속적이고 가장 진부한 것들 속에서 지혜 혹은 진실을 발견할 때가 있다. 어릴 적 이발소에서 맡았던 진한 '포마드' 냄새와 같은 위안의 힘일 것이다.

정말 팍팍하고 우울한 날들이 고공행진중이다. 견뎌야 할 날들이 어쩌면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푸시킨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기쁨의 날이 올 것이라고.그러니 속고 또 속더라도 마음은 미래를 살아볼 일이다. 슬픈 현재란 순간적이라 하지 않는가. 지나가고 지나간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그때 그 이발소에서 들었던 "산이라면 넘어주고 물이라면 건너 주겠다"던 그 노래가 백년설의 노래였던가. 얼라면 얼어주고 녹으라면 녹아주겠다던,사는 대로 살아보고 속는 대로 속아보자던 그 노래 말이다. 이런 뽕짝과 신파의 힘에라도 의지하고 싶은 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