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굴레 벗고 '그랜드 디자인' 모색

삼성그룹 경영권 편법승계 논란의 핵심인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과 SDS 신주인수권부 사채(BW) 발행 사건에 대해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특히 1심에서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이 나왔던 SDS의 BW 발행건에 대해서도 시효에 관계없이 무죄가 선고된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게 재계와 법조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선 법원의 판결대로라면 두 사건은 처음부터 법적 고발 내지는 기소 대상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남아 있긴 하지만,삼성은 경영권 편법 승계 문제에 대한 법적 부담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외아들이자 삼성의 실질적 대주주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향후 행보도 한결 가벼워질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전 회장의 경영일선 퇴진 이후 중심축이 사라진 삼성의 경영체제도 이제 차기 구도를 모색하며 산적한 현안들을 처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것으로 관측된다.

◆'파사현정'의 판결

경제계와 법원 주변에선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일부 시민단체들이 법리도 제대로 따지지 않은 채 여론을 몰아가는 방식으로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를 공격하는 행태가 자제돼야 할 것으로 내다봤다. 법조계 관계자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를 마녀사냥 식으로 무조건 나쁘다고 몰아갔지만 법원은 아니라고 판시했다"며 "삼성의 자체 반성과는 별도로 시민단체 등도 냉철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재판을 지켜본 삼성 계열사의 모 사장은 "오늘 법원 사무실에서 '파사현정(破邪顯正:틀린 것은 고치고 바른 것은 드러낸다는 뜻)'이라는 액자를 봤는데 그대로 판결이 나왔다"며 "이제 이런 문제들로 더 이상 기업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꽉 막힌 경영체제 숨통 트일까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 1심과 마찬가지로 유죄판결이 내려진 대목은 향후 이 전 회장을 비롯한 과거 삼성 수뇌부들의 운신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적어도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내려지는 연말까지는 지금과 같은 경영체제가 유지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지난 6월 그룹 전략기획실이 해체된 뒤 삼성 특유의 집중력이 약화되고 있는 양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고,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초토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이 현 체제를 그대로 밀고갈 수 있는 자체 동력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결국 누가 나서든,삼성은 현 과도적 협의체제를 격변기에 걸맞은 실질적인 경영체제로 바꾸는 '그랜드 디자인'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이재용 전무의 향후 움직임이 주목되는 이유다.

◆'삼성 디스카운트' 상당부분 해소

삼성이 이번 판결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그동안 실추됐던 대외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삼성 관계자는 "그동안 주요 계열사들은 재판으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해외 주요 거래선과 거래를 할 때 불이익을 당하는 '삼성 디스카운트' 현상을 감내해야 했다"며 "이번 판결로 상당부분 해소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전 회장 역시 한때 일본 재계 등으로부터 '경영의 천재'로 추앙받았던 자신의 명예를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 회장은 지난 4월 전격적인 퇴진 이후 적지 않은 심적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일훈/송형석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