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0일이면 삼성그룹이 계열사 독립경영 체제로 전환한 지 3개월을 맞는다.

지난 7월1일 삼성은 쇄신안 후속조치로 이건희 전 회장의 완전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를 공식화함으로써 '회장-전략기획실-계열사 CEO'의 세 축을 중심으로 했던 '삼각편대' 경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룹의 핵심 의사 결정 및 조정권한은 사장단협의회로 넘겨졌고, 투자조정위원회와 브랜드관리위원회가 핵심기구로 등장하는 등 삼성은 지난 3개월 동안 외관상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진도 후퇴도 없었다는 평가가 많다.

컨트롤타워가 사라진 자리를 사장단협의회가 완벽하게 채우지 못하면서 심리적 불안감과 부담감이 조직내에 여전히 남아있고, 지난 4월 발표한 경영쇄신안 가운데 일부는 실행이 미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내달 10일 열릴 '삼성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이 향후 삼성호의 진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쇄신안 얼마나 실천됐나

지난 4월22일 삼성이 발표한 10가지 경영쇄신안 가운데 실행이 완료된 것은 ▲이건희 회장 퇴진 ▲부인 홍라희씨의 리움미술관장 사임 ▲외아들 이재용씨의 삼성전자 최고고객책임자(CCO) 사임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의 대외대표 선임 ▲은행업 포기 ▲전략기획실 해체 ▲이학수 전략기획실장 및 김인주 전략기획팀장 퇴진 등 7가지.
남은 과제는 ▲지주회사 전환 및 순환출자 해소 등 지배구조 개선 ▲사외이사 개선 방안 ▲이건희 전 회장의 차명재산 처리 등 3가지 등으로 실행까지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삼성카드의 에버랜드 보유주식(25.64%)을 4∼5년 내에 매각,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방안은 사장단협의회에서 검토하기로 했으나 아직 논의가 이뤄졌다는 얘기는 없다.

지주회사 전환도 20조원 이상의 막대한 자금 소요때문에 현시점으로서는 검토하기 어렵다는 것이 삼성측 입장이다.

직무 연관성이 있는 인사를 사외이사에서 배제하는 문제는 내년 3월 주주총회에서 논의가 가능할 전망이며, 2조원대에 달하는 이 전 회장의 차명재산 처리 문제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끝나야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부수적이긴 하지만, 이재용 전무가 삼성전자 CCO를 사임하고 신흥시장을 돌며 개척경영에 나서겠다고 한 약속도 삼성사건 2심 재판이 끝난 이후로 넘겨졌다.

◇구심점 부재..여전한 불안

독립경영 체제로 전환한 삼성이 지난 3개월 동안 걸어온 경영행보를 보면 과감하고 공격적인 결정도 없었지만, 딱히 후퇴나 실패라 할 만한 일도 없었다.

우선 경영의 전략적 방향과 관련, 15년전 이건희 전 회장이 내걸었던 '신경영'의 기치는 '창조경영'이 대신하고 있다.

이 전 회장이 제시한 창조경영론을 적극 설파하고 있는 인물은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이윤우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은 창조경영 실천을 위한 4가지 조건으로 ▲창조적 조직문화 정립 ▲기술준비 경영의 적극 추진 ▲시장중시 경영 체질화 ▲협력업체 등과의 상생경영 등 4가지를 내걸었다.

삼성이 내달 1일부터 직원들에게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출근하도록 함으로써 보수적 조직문화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삼성전자가 세계 1위의 메모리카드업체인 샌디스크를 58억5천만 달러에 인수하겠다며 지난 17일 공식 제안서를 낸 것, 지난 7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전문회사인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설립을 결정한 것, 반도체 시장 평정을 위해 '황(黃)의 법칙'을 포기하고 양산기술 중심으로 전환하기로 한 것 등은 '창조경영'이라는 전략적 기조하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시장이 급변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업계의 시황악화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확고한 의사결정 주체나 구심점이 부재한 데서 오는 불안감이 삼성맨들의 발걸음을 잡고 있다.

실제로 삼성 브랜드 가치의 제고를 책임지는 브랜드관리위원회는 신설된 지 3개월이 다 된 지난 24일 첫 회의를 열어 스포츠마케팅을 국가별 지역별로 특화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 전부이고, 투자조정위원회는 아직 한번도 열리지 않았으며,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사장단협의회에서도 주목할만한 결정이 나온 적도 없다.

이 때문에 계열사 독립경영이 섬세한 조율과 협의보다는 '각개약진'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 관계자는 "일선에서는 계열사 독립경영 전환 이후에 직접적인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컨트롤타워가 없는 데서 오는 막연한 허전함이나 과거의 관성에서 오는 불안감같은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특히 CEO급에서 경기침체 장기화나 시황 악화와 맞물려 부담감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항소심이 분수령

이런 가운데 삼성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리는 내달 10일이 삼성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1심에서 이 전 회장에 대해서는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졌고,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 의혹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항소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면 비록 대법원 상고심이 남아있긴 하지만 삼성은 그동안 유보해뒀던 사안들에 대한 결정과 미완의 경영쇄신 약속 실행 등을 신속하게 해나갈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된다.

또 2심 판결은 연말 정례 인사시기에 맞춰 이뤄질 조직 재정비는 물론 내년도 경영계획 수립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일부 삼성 관계자들은 당초 항소심 선고공판이 10월1일로 예정됐다가 10일로 연기되자 "긴장의 시간이 좀더 길어지게 됐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한 삼성 관계자는 "재판과는 무관하게 임직원들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2심 재판이 잘 마무리되면 아무래도 조직에 활력소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맹찬형 기자 mangel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