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5개월여 만에 두바이유 기준으로 배럴당 100달러 밑으로 떨어졌으나 산업계는 여전히 고유가로 촉발된 긴축 경영의 고삐를 늦추지 못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를 육박할 때에 비하면 크게 떨어졌지만 1년전에 비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인데다 유가하락의 효과가 가시화되는 데는 상당한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원 달러 환율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유가하락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어 최근의 국제석유시장의 동향에 대해 안도할 수 없다는 것이 산업계의 공통된 관측이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상당폭 하락했음에도 정유, 항공 등 '고유가 폭탄'을 맞았던 업종은 물론 전자, 자동차 등 유가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한 업종의 기업들도 원자재 및 에너지 절약, 비용절감, 임금동결 등의 비상경영 체제의 골격을 바꾸지 않고 있다.

정유업계는 유가의 등락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수익의 원천은 원유가격과 원유를 정제해서 만든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과의 가격 차이, 즉 정제마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유가의 하락이나 상승에 따라 일희일비할 처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7월과 8월의 정제마진은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게 정유업계의 판단이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최근 정제마진이 조금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좋지 않은 상황"이라며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환율로 인한 환차손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환율과 원유가, 국제제품가격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다양한 해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회사 관계자도 "세계적인 경기 불확실성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어, 에너지 효율을 최대한 높이고, 에너지 절약과 신재생 대체 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유업계는 향후 유가 전망과 관련, 올들어 세계적인 경제 침체의 영향에 따른 석유 수요 부진 등의 이유로 원유가의 약세는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항공업계는 7월 이후 유가가 하락세를 보이자 영업환경이 다소 개선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환율상승과 불경기에 따른 여행수요 감소 등 외부 악재가 계속되고 있어 긴축 경영의 고삐를 단단히 죄고 있다.

매출의 50%를 유류비로 지출하는 항공사들은 최고점에 비해 유가가 배럴달 40달러 가까이 떨어져 비용 압박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환율이 여전히 1천원을 넘어서는 등 부담이 큰 상황이다.

더욱이 내국인의 해외 여행이 5월 이후 석 달 연속 감속하면서 여행 수요가 눈에 띄게 줄고 있는 점도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올초 유가를 WTI 기준으로 배럴당 83달러 선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최근 100달러 내에서 유가가 움직이고 있어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국제 정세나 시장 상황에 따라 유가가 반등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보고 헤지를 하고 있고, 일부 노선은 수요를 따져 조정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유가가 당분간 100달러를 오르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많아 하반기에는 비용 부담이 줄 것으로 예상되지만 여행 수요가 받쳐줘야 실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항공업계는 유가가 1달러 오르면 연간 175억원의 손실을 본다.

아시아나항공은 유가가 100달러대로 떨어져도 연초 예상을 훨씬 웃도는 가격이라 경영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비상경영체제를 유지하고 비용 절감과 시급하지 않은 신규투자는 제한하기로 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단기적으로는 유가가 100달러 밑으로 떨어질 수 있어도 평균100 달러를 웃돌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상반기에 워낙 크게 올라 최근 하락이 반갑기는 해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전자업체들은 유가가 주요 제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해 항공이나 자동차, 조선 등 다른 업종에 비해 유가가 경영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러나 유가가 하락하면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 생산라인 가동 비용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소 부담을 덜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삼성전자, LG전자 등은 비록 유가가 100달러 이하로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변동성이 크고 시황이 불투명한 만큼 지속적인 유가 모니터링과 함께 에너지 및 원가절감 프로세스를 계속 펼쳐나갈 예정이다.

자동차 업계는 일단 유가 하락세가 지속될지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름값 하락으로 인해 국내외 시장에서 소비 심리가 개선돼 매출이 향상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유가가 계속 내려가면 올해 경차 및 소형차 판매를 제외하면 부진을 면치 못했던 미국시장에서 다시 중대형 차종 판매가 확대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제네시스와 모하비 등 중ㆍ대형 고급차를 미국 시장에 본격 출시할 예정이어서 유가 하락을 호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여행업계는 유가가 하락해도 유류할증료가 곧바로 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분간 고환율과 고유가에 따른 어려움은 계속될 것으로 보고 긴축 경영을 강화하고 있다.

하나투어, 모두투어, 롯데관광 등 여행사들은 유가가 최근 들어 하락세고 달러당 100달러 이하까지 떨어졌지만, 이를 반영한 항공사의 유류할증료가 적용되려면 11월 이후에나 가능해 당장에 여행상품 가격 인하 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또한 환율이 달러당 1천100원대를 오르내리면서 고환율을 유지하는 바람에 소비 심리 위축으로 해외 여행 수요가 여전히 살아나지 않고 있어, 유가 하락으로 여행상품 가격이 소폭 낮아지더라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라는게 여행업계 반응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유가 하락은 겨울 여행 성수기인 연말 또는 내년 초에 유류할증료 인하로 연결돼 가뜩이나 어려운 여행업계의 수익 확대에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보이고 있다.

하나투어측은 "유가 하락으로 유류할증료까지 영향을 미치려면 연말이나 돼야 하기 때문에 당장에 긍정적인 영향은 없다"면서 "하지만 유가 하락 때문에 소비 심리가 되살아나면 여행도 늘게 돼 이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CJ제일제당 등 식품제조업체들은 유가 하락에 대해 일단 반기는 분위기다.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처럼 식품제조업체들 역시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LNG와 벙커씨유를 함께 쓰고 있는데, 유가가 떨어지면 원가 부담이 다소 줄어들어 비용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식품제조업체들의 경우 기름값보다는 곡물 등 원자재 비용이 80%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에 밀과 옥수수 등 국제 곡물가격 변동에 더 촉각을 세우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