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후 4시 인천시 남동구 고잔동 남동산업단지 공단대로변 L사 공장.

직원들이 일손을 놓은 채 삼삼오오 담벼락 밑에 모여앉아 있었다.

최근 생산량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조만간 공장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직원은 "기름값과 원자재값이 너무 올라 사장이 공장을 접을 것 같다"며 "취업난이 극심한 현실에서 다른 직장을 구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고 한숨을 쉬었다.

중소제조업체들이 원자재난과 고유가의 직격탄을 맞고 고사 직전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공단 이면도로의 전봇대에는 온통 공장임대 및 매각을 알리는 전단지로 어지럽게 도배돼 있는가 하면 가동을 중단한 채 놀려둔 공장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영세업종은 이미 '줄도산' 가시권


인천 남동공단의 한 가구공장 관계자는 "갈수록 매출이 줄어 현장 근로자와 생산라인을 절반으로 줄이고 공장 한켠은 임대를 놓아 겨우 버티고 있다"며 "그나마 두세 달 전부터 임대료가 잘 걷히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용 특수보일러를 생산하던 H사는 2~3개월째 공장가동을 멈춘 상태다.

인근 G업체 관계자는 "요즘 공장 운영이 어려워 사업을 포기하고 부지를 팔고 나가려 해도 매수자가 없어 '유령공장'이 된 곳이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시화.반월공단에서 만난 C금속 사장은 "최근 공장을 매각하고 얻은 차액으로 겨우 채무를 갚고 임대료가 싼 우즈베키스탄과 지방의 산업단지로 공장을 옮겼는데 최근 주문량이 줄어 또 다시 한계상황에 내몰리고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2400여개 업체가 모여 있는 대구지역 최대 규모의 성서공단 곳곳에는 문 닫은 공장들이 흉물처럼 방치돼 있다.

영세업종이 집중된 대구성서 3공단에서 인쇄업을 하는 이 모 사장은 "내수 경기 위축으로 광고 전단지 의뢰가 급감해 부근 인쇄골목은 사실상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부도상태"라며 울상을 지었다.

부산지역 공단의 입주기업들도 외환위기 때보다 더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다.

"A기업과 B기업이 곧 쓰러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들이 난무한 상태.중소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신평장림공단 내 한 석유화학 관련업체 임원은 "은행과 보증기관들이 대출을 연장해 주지 않거나 회수해 갈까봐 기계를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그렇다고 무작정 제품을 만들면 원가도 못 건지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다"고 밝혔다.

부산 지사공단의 자동차 부품업체 관계자는 "새정부 출범으로 경기가 호전될 줄 알고 수십억원을 들여 설비투자를 했는데 걱정이 태산"이라며 "금융권도 대출을 막고 있어 앞으로 고유가와 원자재난을 극복할 길이 막막하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중기 체감경기 41개월 만에 최저치


이런 가운데 정부정책에 대한 기업인들의 불만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대구 달성공단에서 주물업체를 경영하는 김모 대표는 "정부가 금리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는데 수도권은 어떤지 몰라도 지방은 완전히 죽으라는 소리밖에 더 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광주 하남산단 내 자동차 부품업체 S사 관계자는 "일부 유통업자 사이에서는 요즘 같은 원자재난 속에서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씩 벌지 못하면 바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사재기가 극성을 부리면서 철강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며 정부 대책 수립을 촉구하기도 했다.

공단의 위기 상황은 통계 수치로도 확인된다.

중소기업의 체감경기를 보여주는 7월의 '업황전망 건강도 지수'(SBHI)는 2005년 2월(74.5) 이후 41개월 만에 최저치인 78.2를 기록했다.

중소업계의 위기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일각에선 '중소제조업 하반기 대란'설도 고개를 들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공장 매물도 늘어나고 있다.

서울과 가까워 수도권 최고의 공장입지로 손꼽히는 남동공단도 경영난을 견디지 못해 나온 매물이 전체 공장의 10%가량으로 추정된다.

고잔동 광개토부동산 관계자는 "작년에는 월평균 매물이 2~3건 정도였는데 올해는 6~7건으로 늘었다"며 "원자재가격이 올라 비용이 증가한 데다 최근 엔화금리가 작년보다 2배 정도 오른 연 4% 안팎에 달하면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공장을 내놓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인천 논현동 코아부동산 관계자는 "작년 만 해도 경매가 1년에 한두 건 정도에 불과했는데 올해는 물건이 팔리지 않아 결국 경매로 넘어가는 건수가 7~8개는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건설침체 부메랑…후방산업 매출 격감


최근 들어서는 건설경기와 밀접한 가구.설비.밸브.스티로폼 등을 생산하는 후방산업 제조업체들의 어려움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원자재가격이 올라 채산성이 안 맞는데다 최근 아파트 분양물량마저 급감하면서 납품물량까지 감소하는 등 이중고를 겪고 있어서다.

시화반월공단에서 아파트용 설비제품을 생산하는 S사 관계자는 "올 들어 매출이 20~30% 이상 감소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건설사에 납품했다가 제때 수금이 안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남동공단 내 페인트 업체 B사는 아산신도시에 들어서는 한 아파트 공사를 맡았다가 대물로 받은 아파트가 골치를 썩이고 있다.

B사 대표는 "원래 건설회사가 현금 대신 분양가 2억원짜리 아파트 2채를 한 하청업체에 1억9000만원에 대물로 줬는데,이 물건이 다시 우리 회사로 1억7500만원에 넘겨졌다"며 "급전이 필요해 1억4000만원에 내놓아도 몇 달째 팔리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일감 없어 초저녁부터 소주 찾아


공단 경기의 바로미터인 주변 상권들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반월공단 내 안산종합유통단지 유창상사 전효선 대표는 "30~40개 업체와 각종 물품을 거래하는데 불황업체가 늘면서 매출이 줄고 있다"며 "5월에 비해 6월 수입이 1000만~1500만원 감소했다"고 하소연했다.

인근 T부대찌개 식당 주인도 "점심시간대 손님이 평균 50~60명 선이었는데 요즘은 절반으로 줄었다"고 푸념했다.

남동공단 P식당 주인은 "공장마다 매출이 줄다보니 작업량이 줄어 오후 4시면 퇴근하는 시간제 근로자들이 늘면서 초저녁부터 소주를 찾는 이들도 늘었다"고 말했다.

인근 SK공단2주유소의 길민석 소장은 "등유,경유 매출이 작년보다 30%가량 줄었다"며 "예전에는 저녁 늦은 시간도 차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러시아워만 끝나면 차가 잘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구지역에서도 경기가 급랭하면서 기업인들 간 모임이 부쩍 줄어들면서 성서공단 주변 식당들의 매출이 30~40% 정도 줄어들었다.

◆특별취재팀=이관우/이정선/대전=백창현/인천=김인완/부산=김태현/대구=신경원/울산=하인식/광주=최성국 기자 인턴기자=김영주/김주영/이문용/하경환(한국외국어대)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