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노망이라지만,제겐 로망입니다.'

서울 삼성동 인근 한강 둔치를 가본 사람이면 새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한 할아버지가 유유히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한강 둔치 인라인 동호회원들로부터 '화이트 테크니션'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는 과학기술처 장관(1988~1990년)과 4선 국회의원(11,12,15,16대)을 지낸 이상희 변리사회 회장(70).근엄함부터 느껴질 법한 경력이지만 그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는 삶의 일부다.

그의 스케이팅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하나는 손주를 셋씩이나 둔 칠순의 할아버지가 40~50대 장년들도 '위험하다'며 꺼리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다는 것 자체이고,또 하나는 선수 못지 않은 그의 실력이다.

경력은 4년 정도지만 그는 흥이 나면 양 발뒤꿈치를 맞닿은 채 곡선을 그리는 '사이드러닝',뒤로 달리는 '백워드러닝',장애물 8자 통과하기 및 점프 등 웬만한 기술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숨은 실력파. 얼굴을 알아본 일부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로부터 '장관씩이나 지낸 양반이 노망'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한강 둔치로 나가는 것도 모자라 아예 집에서도 인라인을 신고 살 정도다.

"사실 잠자기 전까지 인라인을 벗지 않아요.

책이나 신문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죠." 그의 인라인 예찬론은 끝이 없다.

"무릎관절이 엄청 좋아져요.

체중을 잘 실어야 하니까.

허리도 유연해지죠.결국 골프도 장타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 치매 예방에도 좋다며 그는 눈을 반짝인다.

"균형을 잡으려면 머리를 많이 써야 합니다.

나이든 사람한테 좋은 거죠.외발로 서는 연습을 하면 더 좋습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의 수명이 하지 않는 사람보다 길고 치매율도 낮다는 연구논문이 있는데,교통사고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집중력과 균형감각이 발달하기 때문이죠."

그가 인라인 스케이트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바빠서 서먹해진 외손주들과 빨리 친해질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사부 격인 손주들에게 인라인을 배우던 때의 에피소드 하나.

손주들은 매일 일기에 '강습기'를 기록하며 할아버지의 '낙상사고'를 걱정했다고 한다.

이 회장이 소개한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외손자의 강습 첫날 일기.

'큰일났다.

할아버지가 이상하다.

그 나이에 인라인을 타겠단다.

' 일주일 후 일기는 더욱 심각했다.

"할아버지가 너무 겁이 없어 걱정이다.

오늘은 팔꿈치가 찢어져 병원에 실려 갔다.

열바늘이나 꿰맸다.

"

6개월 후 다시 들여다본 일기는 사뭇 달랐다.

"큰일났다.

할아버지가 더 잘 탄다.

이젠 나를 가르치려 하신다.

"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호기심과 정열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서울대 약대를 나온 그는 고등학교(부산고 중퇴) 때 심하게 병을 앓고 난 뒤 검정고시를 치르면서 '몸과 정신은 하나가 돼야 한다'는 믿음을 굳혔다고 한다.

머리를 잘 쓰려면 운동을 오히려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밤새 공부를 하면서도 운동은 거르지 않는 마니아가 된 것이 이때부터다.

이 회장은 사석에서 '이빈치'라는 별명으로 더 잘 불린다.

수학,물리,천문,해부,지리,기계는 물론 미술까지 능했던 15세기 이탈리아 천재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인생을 겁없이 즐기다 보니 저절로 얻은 것"이라며 이런 비유에 손사래를 치지만 '멀티플레이어'를 연상하게 하는 그의 이력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약학박사이자 변리사시험 수석 기록을 갖고 있는 그는 중.고교 시절 축구와 농구 학교 대표선수로 뛰었다.

대학 때부터 익힌 합기도는 공인 5단.1970년대 중반 유학한 미국 조지타운대(로스쿨)에서는 탁구 챔피언을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20여년 전부터 수련해온 국선도는 경이로운 수준.그는 기자가 보는 앞에서 손가락 10개로 가부좌 상태에서 몸 전체를 20㎝ 이상 휙 들어올리는 '공중부양'을 선보이더니,곧바로 물구나무를 선 채로 자전거 타는 모습을 연출하는 괴력을 자랑했다.

어렸을 때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지난해 인터넷에서 '칠순기념 UCC동영상'을 선보여 네티즌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손자 둘을 배우로 섭외한 것을 빼놓고는 시나리오 감독 출연 편집 더빙까지 이 회장이 1인5역을 맡은 것.이 UCC는 '칠순할아버지의 애절한 과학사랑 하소연'이라는 제목으로 싸이월드 다음 등에 올려져 3만5000건이 넘는 조회 수와 1000여건의 댓글을 기록한 히트작이 됐다.

"절친한 심형래 감독의 디워를 패러디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장면을 넣었어요.

우리에게 여의주는 바로 과학기술을 의미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인데,반응이 좋아 솔직히 뿌듯했죠."

운동에 관한 한 아쉬울 게 없는 그이지만 2005년부터 맡고 있는 세계사회체육연맹 회장직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표정이 사뭇 심각해진다.

"엘리트 체육에 대한 과도한 집중을 벗어나야 해요.

우리 인구의 절반도 안 되는 호주가 올림픽에서 우리보다 앞서고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메달리스트가 많은 비결이 사회체육 덕분입니다.

우리도 빨리 시작해야죠."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양윤모 기자 yoonm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