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춘 한국노총 신임 위원장이 17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을 찾아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만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파격이었다.

장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투쟁보다는 대화와 화합을 통해 경제 살리기에 앞장서겠다"고 말했고 조 회장은 "노사 화합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켜 경쟁력을 높여나가자"고 화답했다.

유가 및 원자재 값 폭등,미국발 경기침체 현실화 등 대내외 경제환경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재계와 노동계 간에 '상생'의 협력무드가 확산되고 있다.

LG전자 동국제강 코오롱 등 주요 대기업 노조가 '위기 타개에 노사가 따로 있을 수 없다'며 무분규 임금동결에 합의한 건 신호탄일 뿐이다.

민주노총 등 강성 노조진영은 내달 총선 이후 본격적인 '투쟁'을 예고하고 있지만,최근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경영환경 속에서 이들의 운신폭이 좁아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유화ㆍ항공사 앞다퉈 임금동결

원재료 수입의존도가 높아 회사 경영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처한 대기업을 중심으로 무분규 임금동결 선언이 확산되고 있다.

원자재 값과 원ㆍ달러 환율이 동반 급등하면서 이중고를 겪고 있는 유화 항공 철강업종 기업들이 대표적이다.

철강이 주력인 동국제강 계열 5사는 지난 10일 일괄적으로 임금 및 단체협상을 회사 측에 일괄 위임하며 임금을 동결했다.

그룹 계열사가 한 몫에 협상을 사측에 맡긴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철강석 등 원재료비가 급등하고 있지만 완제품 가격에 지속 반영하기 어려운 상황을 노조에서 십분 이해해줬다"고 강조했다.

앞서 대한항공 노사도 임금 동결에 합의했다.

유가 및 환율 급등으로 인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노사가 합심해 헤쳐나가기 위해서다.

이달 들어 하루 걸러 한 번씩 '노사대화합 선언'이 나올 정도로 다른 대기업들의 노사간 협상 분위기도 호전되는 추세다.

LG전자는 국내 대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지난 7일 올해 임금을 동결하는 내용의 임금단체협상 결과를 발표했다.

작년 1조20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지만 악재 투성이의 대내외 환경을 고려해 작년에 이어 한 해 더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한 것이다.

강경노조의 대명사인 자동차업계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감지되고 있다.

기아자동차 노조 관계자 20명은 올 초 '모하비' 신차발표회에 참석,고객 서비스 제고를 다짐했다.

창사 이래 처음이다.

이달 초엔 생산라인의 인력 전환배치에도 합의했다.

쌍용차 노사도 전환배치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시장상황에 따라 가동인력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노조가 물꼬를 터 준 것이다.

◆글로벌 기업도 '노사화합'

올 들어 노사간 화합 무드가 조성되고 있는 것은 경영환경이 그만큼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고유가에 환율 급등,원자재 가격 상승 등 일일이 악재를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다.

최근엔 미국 자동차업체인 크라이슬러가 자동차 수요 감소를 이유로 올 여름 2주간 공장 문을 닫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세계 경기도 침체 국면에 빠졌다.

동국제강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노사평화마저 깨질 경우 회사가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인식이 노사 모두에 확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경험을 통해 노사간 신뢰가 기업의 가장 큰 경쟁력이라는 '해답'도 이미 나와 있는 상태다.

수년째 노사화합의 모범으로 대접받는 기업들 대부분은 한 번씩 비싼 수업료를 치른 경험이 있다.

LG전자는 1989년 3개월간 회사 문을 닫을 정도로 극심한 노사분규에 시달렸고,현재 '세계 조선업계 1위'를 순항 중인 현대중공업도 한때는 파업의 메카였다.

회사가 일단 살고 봐야 노동자도 살 수 있다는 교훈을 몸으로 느낀 뒤 벌떡 일어선 기업들이다.

세계 최고 기업으로 명성을 날리던 미국 대표 자동차 기업 GM이 노조에 발목을 잡히면서 작년 387억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손실을 기록한 사실도 반면교사로 작용하고 있다.

◆대타협 가로막는 복병들

잇따른 노사화합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올해 노사관계를 속단하긴 이르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비정규직 보호법 확대 시행으로 노동계가 술렁이는 가운데 '산별교섭'이라는 악재도 도사리고 있다.

상당한 '노사 힘겨루기'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공공기업의 구조조정도 잠재적 불안요인이다.

일부에서는 과거의 구태도 거듭되고 있다.

만도,알리안츠생명보험,동양실리콘 등이 최근 들어 파업을 벌였거나 아직 진행 중이다.

현대자동차에서는 '노노갈등'마저 불거지는 모습이다.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노사협력을 통한 기업성장이 고용확대와 소득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돼야 국가경제의 미래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기설 전문/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