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펀드 선물환 매매 새 변수로 떠올라

원.달러 환율이 14일 달러당 997원까지 치솟자 딜러들조차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혀를 내두르고 있다.

환율이 워낙 빨리 오르다보니 시장에선 매수 주문만 나오고 매도 주문은 아예 끊기는 '매도 공백' 현상마저 생기고 있다.

실제 이날 한 외환딜러는 오전까지만 해도 환율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달러를 팔았다.

하지만 점심 때 환율이 990원을 돌파하자 다급히 '991원에 30개(3000만달러)를 사달라'는 주문을 냈다.

환율이 더 오를 것으로 보고 서둘러 재매수에 나선 것.하지만 매도 물량은 거의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환율만 급등했고 결국 원하는 물량만큼 달러를 사지 못했다.

이 딜러는 "시장에 환율 상승 기대심리가 너무 강해 매도 물량이 거의 끊겼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날 외환시장이 요동친 것은 시장 참가자들이 환율 상승 쪽에 베팅하면서 '쏠림 현상'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경상수지 적자와 외국인의 주식 매도,3~4월 외국인의 배당금 송금 수요 등으로 기본적인 외환시장의 수급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환율이 당분간 더 오를 것'이란 기대심리가 팽배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달러를 보유한 기관은 매도를 최대한 늦추는 반면 달러가 필요한 쪽은 가격 불문하고 다급히 달러 매수에 나서면서 환율이 별 다른 조정 없이 오름세를 지속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성희 JP모건 지점장은 "기술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던 960원 선이 가볍게 돌파당하고 970~980원 선마저 쉽게 깨지면서 숏(달러 매도) 포지션을 걸어둔 기관들이 다급해졌다"며 "손실을 줄이기 위해 가격 불문하고 (달러를) 사자는 심리가 강해졌다"고 말했다.

수출업체와 수입업체의 선물환 매매,해외펀드의 선물환 매매도 쏠림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올초만 해도 조선업체 등 수출업체는 서둘러 선물환을 매도했다.

당시만 해도 원.달러 환율이 800원대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고 환헤지에 나선 것.반면 정유업체 등 수입업체들은 선물환 매입을 꺼렸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180도 뒤바뀌었다.

환율이 급등하면서 달러를 가진 수출업체들은 여유가 생겼고 선물환 매도를 최대한 늦추고 있다.

외환시장 관계자는 "조선업체 입장에선 환율이 오르면 지금보다 높은 가격에 달러를 팔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수입업체들은 물량이 나올 때마다 서둘러 선물환을 사들이고 있다.

수입업체 입장에선 지금보다 환율이 더 오르면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진우 NH선물 금융공학실장은 "결국 쏠림 현상이 문제"라며 "기본적으로 시장에 달러가 없는 상황에서 선물환을 둘러싼 수출업체와 수입업체의 매매패턴이 환율 급등을 초래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해외펀드의 '다이내믹 헤지'도 외환시장의 새 변수로 떠올랐다.

다이내믹 헤지란 해외펀드가 외국 증시에 투자할 때 원금과 평가이익(손해) 전체에 대해 환헤지를 하는 것.작년 9~10월만 해도 해외 증시 상승으로 평가이익이 났기 때문에 선물환을 매도했지만 최근 전 세계 증시가 폭락하면서 평가손실이 나자 선물환을 매입해야 할 처지가 됐다.

홍승모 신한은행 금융공학센터 과장은 "해외 증시가 급락한 데다 원.달러 환율까지 급등하자 평가손이 늘어나면서 해외펀드의 선물환 매입이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각에선 최근 환율 급등에 대해 과거 2000년대 초반 원화가 다른 통화에 대해 상대적 강세를 보였으며 최근 원화 약세는 이에 대한 '되돌림' 성격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경상수지 적자 등으로 시장의 수급균형이 깨지고 정부가 환율 상승을 용인하고 있는 데다 외환시장 참가자들 사이에 쏠림 현상이 심화되면서 환율 상승세에 고삐가 풀렸다는 것이다.

NH선물 이 실장은 "시장에는 지금 기본적으로 달러가 없다"며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사실상 '미니 외환위기'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