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모(母)기업 만도를 되찾았습니다.아버님이 그토록 염원하시던 일이 이뤄졌으니 이제 편히 잠드세요."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53)이 22일 아침 흩날리는 눈발을 헤치고 선친 묘소를 찾았다. 고(故)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2006년 7월 별세)에게 만도를 8년 만에 되찾아왔다는 벅찬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

네덜란드 국적의 투자회사인 선세이지와 만도 지분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전날 밤 늦게 홍콩에서 귀국한 정 회장은 이날 오전 피로도 잊은 채 경기 양평군 용담리 선영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새벽부터 서둘러 오전 8시30분께 선영에 도착했다.한라그룹의 주요 임원 20여명도 동행했다.한라건설 관계자는 "기쁜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궂은 날씨를 마다하고 새벽길을 달렸겠느냐"며 "정 회장의 표정에는 그동안 마음고생을 가늠케 하는 회환과 감격이 교차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선영 인근에 차를 세우고 눈길을 걸어 묘소에 도착한 정 회장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다가 머리를 숙여 선친께 절을 했다.묵념은 1분 이상 이어졌다.그만큼 선친인 정 명예회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묵념을 끝낸 정 회장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동행한 임원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어쩔 수 없는 듯했다.정 회장은 그리고는 먼 산을 쳐다보며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만도 인수를 계기로 회사를 더욱 건실하게 키워나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듯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이날 정 회장은 선친 묘소에 15분간 머물렀고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묘소 주위를 돌았다.만도를 되찾았다는 기쁨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선친과 나누고 싶은 듯했다.

우리나라 중공업 역사의 선구자인 고 정인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만도를 어떻게든 되찾아와야 한다"고 수시로 다짐했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실제 만도를 되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한번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아 오기는 쉽지 않았다.

세 번 쓰러진 뒤 네 번 일어나는 투지를 보여 재계의 '부도옹'으로 불렸던 정 명예회장은 신군부에 의해 현대양행(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을 빼앗기고도 만도기계를 주축으로 한라그룹을 세워 재계 서열 12위까지 올랐던 만큼 만도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었다.

한라 관계자는 "정몽원 회장은 외환위기 여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알짜기업인 만도를 외국회사에 매각한 뒤 되찾아오지 못한 한을 가슴에 묻은 채 타계한 선친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며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숙원사업을 해결한 만큼 감개가 무량했을 것"이라고 말했다.다른 관계자는 "한라그룹에는 요즘 좋은 일만 생기고 있다.모두가 선대 회장님께서 보살펴 주시고 있는 덕택인 것 같다"고 했다.

정몽원 회장은 이날 산업은행,H&Q(국민연금 사모펀드),KCC 등 한라건설 컨소시엄에 참여한 업체 관계자들과 만난 데 이어 만도 임원진과도 면담을 가졌다.이 자리에서 정 회장은 만도 지분 인수작업이 원활하게 이뤄질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회장은 이번 만도 인수 과정에서 커다란 힘을 보태준 범(汎)현대가의 어른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직접 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