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생(許龜生) <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 부원장·역사학 >

격동의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답게 우리는 연말만 되면 지나간 한 해를 가리켜 '다사다난'했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지만 올해는 이 같은 상투적 표현이 제법 실감 있게 다가온다.

대형 사건,사고가 유난히도 많았기 때문이다.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면서 대선 막바지까지 쟁점이 됐던 BBK 의혹은 특검까지 받게 돼 해를 넘길 전망이다.

거기에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의 충격과 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여수 앞바다에서 질산 2000t을 실은 선박이 침몰해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또한 대입 수능시험의 등급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와중에 복수 정답 사태까지 일어나 입시 혼란을 가중시켰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여름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 위조사건 이후 우리 사회 각계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인사들의 허위 학력 사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시끄럽더니 연말까지 그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자기기인(自欺欺人)'을 선정했다는데 이 때문인 모양이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뜻이다.

남을 속이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인간 행위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다 해 본 짓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었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올해 우리 사회에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여수가 2012년 세계 엑스포 개최지로 선정됐다.

수려한 남해의 풍광과 깨끗한 자연환경,그리고 우리의 선진 기술이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온 국민이 기뻐했고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로 받았던 상처가 그나마 위로를 받았다.

박태환은 한국 선수 최초로 세계 수영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고 월드컵 3개 대회에서 모두 3관왕이 됐다.

김연아는 국제빙상연맹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2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영화 '밀양'에서 열연한 전도연은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기쁜 일,슬픈 일,안타까운 일들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가슴에 마치 자기 일처럼 체화(體化)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발달해 사회적 소통이 활발해지고 감성에 어필하는 이미지 매체들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소리치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을 추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말없이 태안으로 몰려들어 거대한 인간띠를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그동안 많이 성숙해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잠시 잊고 '텔 미'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여유도 그런 성숙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세상에는 행복이 있고 불행도 있다.

어떤 것은 빠르고 어떤 것은 느리다.

날씨가 맑을 때도 있고 흐릴 때도 있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 같은 이런 일들이 사실은 연결돼 있다.

행복이 없으면 불행도 없고,기쁜 일이 없으면 슬픈 일도 없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행복과 불행,빠른 것과 느린 것 등 서로 대립되는 것들을 연결하고 그 속에서 균형을 확립하는 '리듬'을 되살리는 것이 현대인의 삶에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리듬은 사람들 각자의 삶에 안정된 흐름을 보장해 주는 균형추 역할을 하지만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조화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억지로 극복하려 하지 말고 껴안고 가야 한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을 슬프게 하거나 화나게 만드는 일도 나름대로의 질이 있고 격조가 있는 법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해 자신까지 속이는 무서운 일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자연을 무참하게 훼손하고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끼니 걱정을 하게 만드는 일은 이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다.

2008년에는 꼭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