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기고] 낮은데로 임하는 마음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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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 >
오늘날 성탄절은 만인의 축제일이다.
뭐 좀 알고 지내든 모르고 지내든,제대로 지내든 아니든,순수한 것이든 상업적인 것이든,이날 모처럼 온 지구인이 들썩거리며 기쁨의 향연을 벌이니 그것도 좋은 일이다.
대한민국의 이번 성탄절은 유난히 어수선한 가운데 맞이하게 됐다.
꼭 엿새 전에 치러진 대선 때문이다.
선거유세 때만 해도 각 정당의 후보들은 국민의 다양한 염원을 대변하며 모든 계층의 소중한 주권을 살려내는 듯했다.
하나 끝나기가 무섭게 승자 편에 섰던 사람들은 기세등등해졌고,패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냉정히 말하건대 나는 그 어느 편도 아니다.
모두의 편이다.
그래서 말인데,이번에 새로 들어설 정부는 부디 승리감에 도취돼 자만이나 독단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경선(競選)에 참여한 다른 모든 정당이나 관계자들,그리고 지지자들은 패배감이나 좌절에 떨어지지 말고 이전처럼 당당하게 자신들의 뜻을 합리적인 절차로 관철시키기를 바란다.
이 사회가 부디 승자와 패자로 갈리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승자로 행사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성탄의 정신이 꼭 이랬다.
2000년 전 구세주 아기 예수님은 당시 기득권층을 놔두고 일부러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
이렇게 해서 골짜기를 메우고,결국 모두를 안으셨다.
돌이켜보면 내 기억 속에 가장 남는 성탄절은 아직 성당에 다니지 않던 고등학교 1학년 때,친구들과 맞은 성탄절이었다.
그 날 우리는 대여섯 명이 어느 친구의 자취방에 모여서 밤새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새우깡,맛동산 등 군것질거리와 김치 쪼가리를 안주 삼아 처음으로 소주를 마시던 그 기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덕분에 생판 낯설던 고고춤을 배웠고 우정도 쌓았으니 참으로 고마운 성탄절이었다.
이후 성당을 다니면서 사뭇 달라진 방식으로 성탄절을 지냈지만,필자의 추억 속에는 그날의 낭만이 더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왜일까?
그 하나는 목동들이다.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전달받은 사람들은 당시 목동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출중한 인물이 아니었다.
심하게 말해서 그들은 천민(賤民)이었으며 괄시받는 사람들이었다.
그 때 나와 친구들의 처지가 꼭 그랬다.
중학교 때 공부는 한가락들 했지만 집안 형편이 워낙 여의치 못해 오로지 장학금을 받기 위해 인문계가 아닌 공고를 선택한 불우한 청소년들이었다.
그 둘째는 구유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 마구간 구유였다.
구유! 구유는 소나 말이 먹이를 먹는 통이다.
사람들의 생각에 결코 새로 난 아기를 눕힐 만한 통이 못된다.
이는 한마디로 가난과 비천의 상징이다.
조금은 과장일 듯 싶지만 그날 우리가 모여 놀았던 그 친구의 자취방이 거의 구유 수준이었다.
연탄가스가 배어 있는 칙칙하고 냄새나는 방이었다.
벽지며 이불이며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필시 오늘 이 사회에도 여전히 '오늘의 목동'들이 어디선가 꿈들을 꾸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오늘의 구유'들이 어디선가 곧이어 자신들 품에 안길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비천한 줄 알고,부족한 줄 알고 그것을 시인하는 사람,그가 바로 오늘의 목동이 아니겠는가.
누구에게든 마음 한켠에 자리한 '칙칙하고 냄새나는 구유',그것은 나의 고통일 수 있고 상처일 수 있고 아직도 곪고 있는 심리적 종기일 수 있다.
그것은 콤플렉스일 수 있고 고독일 수 있고 우울증일 수 있다.
그곳이 바로 곧 오실 새 빛이 드리울 자리다.
지금 이 시간 그 어느 곳이든 '어둡고 암울한 그 구유'에 아기 예수님 오심을 독자들과 함께 기뻐한다.
새 정부와 함께 맞을 새 시대에 앞서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이 성탄절이 국민 모두에게 축복된 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오늘날 성탄절은 만인의 축제일이다.
뭐 좀 알고 지내든 모르고 지내든,제대로 지내든 아니든,순수한 것이든 상업적인 것이든,이날 모처럼 온 지구인이 들썩거리며 기쁨의 향연을 벌이니 그것도 좋은 일이다.
대한민국의 이번 성탄절은 유난히 어수선한 가운데 맞이하게 됐다.
꼭 엿새 전에 치러진 대선 때문이다.
선거유세 때만 해도 각 정당의 후보들은 국민의 다양한 염원을 대변하며 모든 계층의 소중한 주권을 살려내는 듯했다.
하나 끝나기가 무섭게 승자 편에 섰던 사람들은 기세등등해졌고,패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냉정히 말하건대 나는 그 어느 편도 아니다.
모두의 편이다.
그래서 말인데,이번에 새로 들어설 정부는 부디 승리감에 도취돼 자만이나 독단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경선(競選)에 참여한 다른 모든 정당이나 관계자들,그리고 지지자들은 패배감이나 좌절에 떨어지지 말고 이전처럼 당당하게 자신들의 뜻을 합리적인 절차로 관철시키기를 바란다.
이 사회가 부디 승자와 패자로 갈리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승자로 행사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성탄의 정신이 꼭 이랬다.
2000년 전 구세주 아기 예수님은 당시 기득권층을 놔두고 일부러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
이렇게 해서 골짜기를 메우고,결국 모두를 안으셨다.
돌이켜보면 내 기억 속에 가장 남는 성탄절은 아직 성당에 다니지 않던 고등학교 1학년 때,친구들과 맞은 성탄절이었다.
그 날 우리는 대여섯 명이 어느 친구의 자취방에 모여서 밤새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새우깡,맛동산 등 군것질거리와 김치 쪼가리를 안주 삼아 처음으로 소주를 마시던 그 기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덕분에 생판 낯설던 고고춤을 배웠고 우정도 쌓았으니 참으로 고마운 성탄절이었다.
이후 성당을 다니면서 사뭇 달라진 방식으로 성탄절을 지냈지만,필자의 추억 속에는 그날의 낭만이 더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왜일까?
그 하나는 목동들이다.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전달받은 사람들은 당시 목동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출중한 인물이 아니었다.
심하게 말해서 그들은 천민(賤民)이었으며 괄시받는 사람들이었다.
그 때 나와 친구들의 처지가 꼭 그랬다.
중학교 때 공부는 한가락들 했지만 집안 형편이 워낙 여의치 못해 오로지 장학금을 받기 위해 인문계가 아닌 공고를 선택한 불우한 청소년들이었다.
그 둘째는 구유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 마구간 구유였다.
구유! 구유는 소나 말이 먹이를 먹는 통이다.
사람들의 생각에 결코 새로 난 아기를 눕힐 만한 통이 못된다.
이는 한마디로 가난과 비천의 상징이다.
조금은 과장일 듯 싶지만 그날 우리가 모여 놀았던 그 친구의 자취방이 거의 구유 수준이었다.
연탄가스가 배어 있는 칙칙하고 냄새나는 방이었다.
벽지며 이불이며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필시 오늘 이 사회에도 여전히 '오늘의 목동'들이 어디선가 꿈들을 꾸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오늘의 구유'들이 어디선가 곧이어 자신들 품에 안길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비천한 줄 알고,부족한 줄 알고 그것을 시인하는 사람,그가 바로 오늘의 목동이 아니겠는가.
누구에게든 마음 한켠에 자리한 '칙칙하고 냄새나는 구유',그것은 나의 고통일 수 있고 상처일 수 있고 아직도 곪고 있는 심리적 종기일 수 있다.
그것은 콤플렉스일 수 있고 고독일 수 있고 우울증일 수 있다.
그곳이 바로 곧 오실 새 빛이 드리울 자리다.
지금 이 시간 그 어느 곳이든 '어둡고 암울한 그 구유'에 아기 예수님 오심을 독자들과 함께 기뻐한다.
새 정부와 함께 맞을 새 시대에 앞서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이 성탄절이 국민 모두에게 축복된 날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