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생(許龜生) <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 부원장·역사학 >

1972년 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서울의 모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던 K군이 교내에서 형사들에게 체포돼 끌려갔다.

'화동주보'라는 유인물을 통해 유신헌법을 비판함으로써 계엄 포고령을 위반했다는 혐의였다.

그리곤 일주일도 채 안돼 사건에 연루된 친구들이 모두 체포됐다.

K군은 이것이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며 일생의 짐으로 짊어졌고 아직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은 그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상신하기 위해 증빙서류를 찾았다.

그러나 그 어느 정부기관에서도 관련 서류를 찾을 수 없었다.

정황 자료조차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K군의 유공자 상신 작업은 결국 중도에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 참으로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국가 유공자의 자격을 심사하고 보훈을 관리하는 보훈처의 차장이 2004년 자신의 지병을 공상(公傷)으로 허위 처리해 국가유공자 자격을 얻었다고 한다.

또 다른 보훈처 공무원은 동호회 등산 중 발목을 다친 것을 공상으로 허위 신고해 역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예우받아야 할 많은 사람이 관료주의적 절차의 엄격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마당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관리 책임을 악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보훈처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문제는 이 같은 일이 비단 보훈처에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윤재,변양균,전군표씨 등 내로라 할 정부의 핵심 관료들이 각종 비리 혐의로 줄줄이 구속돼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으며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급기야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아노미(anomie)'라는 단어 이외에는 표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노미는 사회 구성원의 욕구와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실종된 혼돈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대체로 이 같은 사회 해체 현상은 낡은 규범체계가 무너진 가운데 새것이 정립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다.

따지고 보면 이는 노무현 정부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서열 파괴의 파격적 인사와 민주적 의사 절차 확립을 통해 정치적 권력집단과 관료사회에 만연해 있던 낡은 규범체계를 무너뜨렸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이 땅에 지속돼온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권위를 해체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갖춘 규범체계를 확립하고 새로운 권위를 세우는 대신,언론 등 자신과 생각이 다른 집단들과의 소모적 정쟁(政爭)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관료조직과 공기업은 국민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아픈 데를 어루만져주는 서비스로 보답하기는커녕 원칙 없는 규제와 통제로 국민을 괴롭히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아노미 현상이 이제 사회 전체로 퍼지고 있다.

특목고의 입시 문제가 사전에 학원에 유출되는 입시 비리가 발생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어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또한 세금을 물지 않는 소위 대포차(불법 명의 차량)의 숫자가 무려 14만여대나 될 뿐 아니라 일부러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등 공권력을 희롱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예 공권력을 폭력적인 수단으로 무력화시키려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며칠 전 정부의 집회 금지 통보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범국민 행동의 날' 행사 참가자들은 경찰차량을 파괴하고 경찰관들에게 폭력을 사용했다고 한다.

집회의 목적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임기가 몇 달 남지 않은 노무현 정부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것이 아니라 관료조직부터 다잡아서 일탈적 행위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만약 그럴 자신이 없으면 기자실을 다시 열어 언론에 감시 역할을 맡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