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실에 들어간다.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손잡이를 급히 오른편으로 돌린다.
이번에는 너무 차다.
반대편으로 다시 돌린다.
너무 뜨겁다.
샤워하는 내내 뜨거운 물과 찬물 세례만 번갈아 맞는다.
수도꼭지를 적당한 곳에 틀어둔 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쾌적한 샤워를 즐길 수 있을텐데 말이다.
일명 '샤워실의 멍청이'다.
정부의 재량권 남용(濫用)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책실패를 신랄하게 비판한 밀턴 프리드먼의 예화다.
정확히 30년 전에 시작된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2000년까지 꾸준히 확장돼 왔다.
2000년 의약분업 및 건강보험 통합을 졸속으로 시행하면서 재정이 급속하게 악화됐다.
2001년 건강보험 재정안정화 대책을 내놓으면서 보장범위를 축소하기 시작했다.
2005년 상반기까지 그랬다.
보장 축소와 보험료 인상 덕택에 흑자가 생기자 2005년 하반기부터 보장 확대로 돌아섰다.
올해 또다시 당기적자가 4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샤워실의 멍청이와 다르지 않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엉뚱한 곳에 화살을 돌리고 있다.
시장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민영의료보험이 환자 자기부담금을 보장함으로써 도덕적 해이와 과잉진료를 부추기고 그 탓에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악화됐다는 것이다.
정책실패를 시장실패로 둔갑시키려는 어불성설이다.
의료비 추가부담분만 보험회사가 지불해주는 실손형 보험의 경우 도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데 말이다.
도덕적 해이는 시장이 아니라 정부정책의 실패에 기인한다.
주로 실적 올리기에 급급해 남발한 정책들이 주범이다.
2005년부터 암을 포함한 중증질환 중심으로 보장성을 풀다보니 보장률 수치가 별로 올라가지 않자 대뜸 식대를 동원했다.
올해에만 5000억원이 훨씬 넘는 돈이 식대로 들어간다.
6세 미만 소아환자 입원 진료 본인부담금 면제 제도도 그렇다.
병원 측과 부모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걸핏하면 어린이들을 입원시킨다.
건강보험 재원은 거덜 나고 민영보험사들도 소아환자 입원비 지급이 대폭 늘었다.
민영보험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의 실패가 도덕적 해이를 부추겨 공보험은 물론 민간보험사에도 손해를 끼치는 반례다.
개혁의 단초는 공보험 시스템에 있다.
철저한 보험료 수입 관리와 알뜰한 급여 지출이 필수적이다.
납부 능력을 갖춘 고액 체납자와 교묘한 방법으로 보험료를 적게 내는 자들이 즐비한데 전국민을 대상으로 6.5%나 보험료를 올린단다.
사회보험 징수통합 및 국세청과의 쌍방향 정보 활용을 통한 조직 효율화로 매년 5000억원을 아낄 수 있다는 국무조정실의 연구결과가 있는데 건보공단에서만 1만명이 넘는 인력이 매년 1조원이 넘는 돈을 쓰고 있다.
잠재력이 큰 우리 의료산업이 개방에 대비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건보공단과 의무적으로 계약을 맺도록 돼 있는 요양기관 당연 지정제를 없애고 의료기관의 자율에 의해 체결되는 계약제가 도입돼야 한다.
영리목적으로 운영되는 의료기관의 허용은 필수 선결조건이다.
또 현재의 박리다매식 3분진료 체제에서 벗어나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누리려면 의료 수가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물론 태국,싱가포르에까지 형성돼 있는 거대한 의료관광 시장과 매년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폭발적 의료수요 가운데 일부라도 국내로 흡수한다면 우리 모두가 윈윈(win-win)할 수 있다.
혹자는 건강보험 재정악화의 원인을 고령화로 인한 노인 의료비 증가나 고가 의료 장비 증가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외생변수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충분히 예상돼 왔기에 정부의 정책 수립에 충분히 감안됐어야 한다.
복지부와 건보공단은 국민 혈세를 써가며 건강보장 30년 자축연을 한 달이 멀다하고 벌일 때가 아니다.
선진국 수준의 국민건강을 달성하기 위해 향후 30년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