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발업체 따라 올테면 따라와 봐"

설비투자확대 전략에 세계 D램업계 '구조조정 바람' 촉각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2001년은 '암흑의 시기'로 통한다.

1999년 시작된 'IT(정보기술) 버블 붕괴'의 여파로 2001년 D램 값이 90%가량 폭락하면서 세계 주요 반도체업체들은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메모리반도체의 강자였던 일본 NEC와 마쓰시타가 반도체 사업을 구조조정했고,일본 도시바는 D램 사업을 포기했다.

이후 별다른 구조조정의 위기를 맞지 않았던 반도체 업계가 다시 한번 술렁이고 있다.

최근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급락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의외의 '투자확대 카드'를 들고 나왔기 때문.특히 삼성전자는 올 하반기 반도체 설비투자액을 1조4000억원이나 늘리기로 결정해 내년에도 '공급과잉→가격폭락' 추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후발업체들은 2001년에 이어 다시 한번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불어닥치는 게 아니냐며 숨죽여 지켜보는 분위기다.



◆삼성전자,'방관'에서 '공세'로

메모리반도체 시장 1위인 삼성전자는 2000년 이후 후발주자들을 압박하기보다는 '파이'를 키우는 전략을 펴왔다.

예컨대 D램이 공급과잉일 경우 가격을 떨어뜨려 후발업체들을 고사시키기보다 D램 공정을 낸드플래시로 전환해 가격을 안정시키는 식이었다.

덕분에 다른 D램 업체들은 공급과잉에 따른 수익성 악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이닉스도 2005년 워크아웃 졸업 이후 시장 지배력이 커짐에 따라 삼성전자와 같은 전략을 추구해왔다.

문제는 이 같은 전략의 결과 지난 3년간 후발업체들의 시장점유율 잠식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

삼성전자의 D램 점유율은 2005년 30.9%에서 올 상반기 27%로 하락했다.

반면 같은 시기 일본 엘피다는 5.1%포인트(7.1%→12.2%),독일 키몬다는 1.8%포인트(12.8%→14.6%)가량 점유율이 늘었다.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연출됐다.

양보하다 시장을 빼앗기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올 하반기 설비투자를 늘려 내년 하반기 생산량을 지금보다 30%가량 늘리기로 했다.

'방관'에서 '공세'로 전략을 수정한 것.하이닉스도 당초 계획대로 내년에 12인치 팹 건설 등에 4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업체들의 투자확대는) 마치 포커판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판돈을 크게 올린 것과 같다"며 "나머지 사람들(후발업체)로서는 카드를 접을 것인지,아니면 계속 게임을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발(發) 구조조정 오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공격적 시장개입'에 해외 업체들은 '초긴장'하는 분위기다.

당장 D램 업계의 대표적 후발주자인 파워칩과 난야 등 대만업체들이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파워칩과 난야가 지난 2분기에 이어 3분기에도 D램 가격 급락으로 막대한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삼성의 공급물량 확대를 견딜 수 없을 것이란 점에서다.

지난 2분기 각각 1억9500만유로와 3억6600만달러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독일 키몬다와 미국의 마이크론도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업계는 이 같은 한국업체들의 투자확대에 후발업체들의 대응전략을 크게 세 가지로 보고 있다.

먼저 후발주자들이 한국업체들의 공급확대 전략에 밀려 순순히 투자를 축소하는 것이다.

이 경우 반도체 가격은 안정세로 돌아서고,공급물량을 늘린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수익성은 좋아진다.

하지만 후발업체들이 삼성 등에 정면으로 맞서 투자를 확대하고 나오면 공급과잉이 더욱 심화돼 반도체 가격 폭락이 불가피하다.

이렇게 되면 일부 하위권 업체들은 수익성 악화를 감내하지 못하고 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후발업체들끼리 자발적인 '합종연횡'을 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 장기적으로는 공급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이 안정되고,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시장지배력도 커질 전망이다.

결국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입장에서 '투자확대'는 단기적으로 손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득이 되는 카드가 되는 셈이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