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밑그림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찾아냈을 때의 기쁨은 황홀경과도 같죠."

소설가 박완서씨(76)가 신작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단편집으로는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이후 9년 만이다.

2001~2006년 '현대문학''문학과사회''문학동네' 등 주요 문예지와 일간지에 발표해온 9편을 묶었다.

18일 삼청동에서 기자들과 만난 박씨는 "9년 만에 소설집을 내놓는다고 하지만 그동안 내 나이에 맞게 활발한 활동을 했다"며 "아직도 소설을 쓰는 것은 나에겐 큰 기쁨이자 위로"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2000)과 '그 남자네 집'(2004)을 잇달아 펴내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번 작품집에서는 박완서 특유의 신랄함이 다소 누그러졌다.

이전에는 매끈해 보이는 세상사의 이면을 뒤집었다면,이번에는 '위선' 또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보호막'이라는 생각이 엿보인다.

삶의 밀도있는 형상화는 여전하다.

자주 찾는 시부모가 귀찮아 집에 없는 척하는 아들 내외('촛불 밝힌 식탁')나 무의탁 노인들은 도와주면서 정작 시아버지는 박대하는 며느리('마흔아홉 살') 등 삶과 밀접한 이야기들이 의미심장하게 펼쳐져 있다.

자신의 경험도 소설 속에 녹였다.

'그래도 해피엔드'는 버스 뒷문으로 탔다가 기사와 승객들에게 호되게 질타받은 일을 옮긴 것.'그리움을 위하여'에 나오는 사촌 동생도 실제로 사량도에 살고 있는 그의 사촌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

한국 문단에서는 드물게 노년 문학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친절한 복희씨''그리움을 위하여' 등에 50대 이후의 화자를 등장시켜 감정의 섬세한 물결들을 잘 표현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저 나이에 무슨 재미로 사는지가 궁금했지만 이렇게 나이가 들고 보니 나름대로 사는 재미가 있습니다.

아직 마음은 젊답니다."

하지만 이젠 연애소설을 쓰는 것은 힘들 것 같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의 연애감정에는 공통점이 있지만 연인들의 '노는 마당'이 예전과 너무 달라졌다는 것.휴대폰 사용법부터 데이트 장소까지 사소한 '소품'의 사용법도 만만치 않은 '벽'이다.

그래도 소설을 여전히 쓰고 싶은 것은 독자가 자신을 '알아주는' 기쁨 때문이다.

"소설을 써나가는 것은 마치 퍼즐에서 빈 자리에 꼭 맞는 조각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기분이죠.제가 소설 속에 집어넣은 표현과 숨은 의도들을 독자들이 찾아내는 것만큼 큰 즐거움은 없답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