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 원 <소설가>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고향에 다녀왔다.

몇 년 전 도농(都農) 통합으로 행정지명으로는 강릉시에 속하지만,도회지 사람들 눈엔 아직 옛모습 그대로 이런 마을이 있나 싶을 만큼 깊은 대관령 아래의 시골마을이다.

초가집이야 우리 어린 시절 진작에 없어졌지만,그 시절에 개량해 올린 녹슨 양철지붕이 그대로 남아 있고,마을 전체에 3층짜리 건물 하나 없는 그런 조용한 마을이다.

다른 곳에 비하면 시간도 참 더디 흘러가는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명절 제례의 풍습까지 옛모습 그대로여서 거기에 더해지는 이런저런 절차와 준비를 위한 신경씀이 이만저만 아니다.

명절 전 열 몇 개의 산소를 미리 벌초해야 하고,모여서는 또 명절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추석날 아침의 모습도 차례를 지낸 다음 예전에 할아버지가 앞장서셨던 길을 지금은 연세 여든의 아버지가 앞장서서 집안의 대부대가 이 산소 저 산소 성묘를 다닌다.

어른들은 저마다 머리에 갓을 쓰거나 유건(儒巾)을 쓰고,가을바람 속에 도포자락 펄럭이며 성지순례를 하듯 산소 순례를 한다.

그 모습만 보자면 30년 전이나 40년 전이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그래도 일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남들은 치르지 않는 북새를 떨듯 고향에 다녀오면 다시 몇 달 도시생활을 해나갈 어떤 기운을 충전하고 오는 듯한 마음이다.

때로는 그것 자체가 명절 스트레스처럼 느껴질 때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내게 고향만큼 큰 위로와 위안을 주는 곳도 없다.

그러나 그런 고향이 갈 때마다 늘 넉넉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내 마음 안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넉넉한 곳이기에,때로는 그 깊이만큼의 아픔과 안타까움도 함께 갖고 있다. 어제 오늘 얘기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자꾸 농촌을 떠나고 있다. 떠날 사람들은 다 떠난 듯 싶은데,그래서 이제 더 떠날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도 갈 때마다 하나둘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 딱딱한 마당에 풀씨부터 날아든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사람이 밟고 다니던 마당이 금세 바랭이와 개망초밭이 된다.

이듬해부터는 쑥과 억새 같은 여러해살이 풀이 힘으로 밀고 들어온다.

사람 살던 집이 이태 만에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빈집이 된 지 5년쯤 되면 그동안 사람 훈김을 받지 못해 마루가 썩기 시작하고 추녀 한쪽이 주저앉기 시작한다.

마당의 사정은 더욱 고약스러워진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붉나무와 가중나무,싸리나무 같은 관목들이 뿌리를 내린다.

아마도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집을 받들어 세우는 것은 기둥과 서까래가 아니라 바로 사람의 훈김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명절 때마다 반가운 마음으로 고향에 가도 정작 동네 둘러보기가 겁날 때가 있다.

지금은 풀밭으로 변한 저 마당에서 우리는 딱지를 치고 비석치기를 하다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주먹질을 하며 놀았다.

친구 집 마당가에 서서 예전에 그 집에 살던 친구 이름을 가만가만 부르면 저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모두 나처럼 도시로 떠났다.

나보다 일찍 떠난 친구도 있고,늦게 떠난 친구도 있다.

가장 마음 아프게 떠난 건 한때 영농후계자로 비육우다,양돈이다,특용작물이다,나라에서 장려하는 대로,또 그렇게 하면 도시 고소득자 부럽지 않다는 대로 이것저것 다해보며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빚만 잔뜩 지고 온다간다 말없이 밤에 떠난 친구다.

몇 년 전에 한번 자기가 있는 곳을 밝히지 않고 힘들게 안부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다.

소를 키우고 논밭을 가꾸던 손으로 못과 망치를 잡고 이곳저곳 떠돈다고 했다.

명절 가까이 되어 술 한잔 하고,고향 생각이 났을 것이다.

차마 손해를 끼치고 온 형제들에게는 전화를 하지 못하고,한 마을에서 자란 옛친구인 내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명절이 되어 고향에 다녀올 때마다 이 친구 얼굴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진다.

어디서든 부디 건강해라,내 오랜 친구.그리고 멀지 않은 날,우리 다시 고향집 마당에서 만나자.그러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고 또 건강해야 돼,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