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이다/ 하늘 아래 문이 있다// 이제 문을 잊고 싶다// 나는 문이 아니다.'('나는 문이다'의 자서)

시인 문정희씨(60)가 열한번째 시집 '나는 문이다'(문학에디션 뿔)를 출간했다.

2004년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이후 3년 만이다.

40년 가까이 작품활동을 해온 그는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나 성찰보다 '현재'를 쓰는 시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시집을 내면서도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생기있는 언어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고통이 작품 곳곳에 스며있다.

'당신이 이 시를 읽을 때/ 시인의 눈물은 잊어도 좋습니다/ 당신의 손가락에 보석이 빛날 때/ 그물채로 사금을 거르던 여자의/ 찢어진 옷 사이로 내비치던 검은 살과/ 진흙더미 속에 깨어진 손톱은/ 제발 잊어도 좋습니다/ 당신의 손가락에 보석이 빛날 때.'('당신의 손가락에 보석이 빛날 때' 중)

하지만 시를 완성하고 나서 느끼는 쾌감은 그런 고통까지도 황홀하게 덮는다.

'상처로 깊게 뚫린 터널에서/ 언어로 사랑을 잡으려다 그 속에 함몰한다/ 그때야 시인의 아름다운 도벽은 끝이 난다/ 그의 밤은 늘 고통에 떨었지만/ 불멸을 꿈꾸는/황홀한 밤이었다고 고백한다.'('도둑 시인' 중)

시에 대한 열정은 시인의 나이마저 잊게 한다.

어느새 이순(耳順)에 다다랐지만 시인의 귀는 아직도 푸르다.

'터미널에서 겨우 잡아탄 택시는 더러웠다/ 삼성동 가자는 말을 듣고도 기사는/ 쉽게 방향을 잡지 않더니/ 불붙은 담배를 창 밖으로 홱 집어던지며/ 덤빌 듯이 거칠게 액셀을 밟았다/(중략)/ 그에게서 믿을 수 없는 한 소년이 튀어나왔다/ 한 해 여름 가난한 시골 소년이 쳐다볼 수 없는/ 서울 여학생을 땡볕처럼 눈부시게 쳐다보았다고 했다.'('그 소년' 중)

시를 향한 그의 민감한 촉수는 여성으로서의 삶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그것은 끊임없이 사랑을 노래하는 사춘기 소녀의 모습처럼 화사하다.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응"' 중)

문학평론가 이혜원씨는 "'시'와 함께 시인이 가장 열렬하게 추구하는 가치는 '사랑'"이라며 "그녀의 시는 사랑을 논할 때 가장 활기차고 매혹적"이라고 평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