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역사상의 運河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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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星來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요즘은 경부(京釜)운하가 화제지만,우리 역사에도 운하 계획은 여러 번 있었다. 지난 1월에 출간된 성균관대 오호성 명예교수의 책만 보아도 태안(泰安)운하,용산(龍山)운하,그리고 김포(金浦)운하 등이 소개돼 있다.
오 교수의 '조선시대의 미곡 유통(米穀流通) 시스템'은 쌀이 당시 어떻게 전국에서 서울로 운송되고 유통되었는지 설명한다. 책 제목 푼수로는 '운하'란 별로 상관없을 듯하지만,사실은 바로 쌀의 유통 때문에 선조들은 이런 운하를 계획했다.
화폐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 쌀은 먹거리이며 동시에 '돈' 노릇도 했다. 전국에서 거둬들인 쌀은 배로 운반해 서울로 가져갔다. 도로도 형편없고,운송 수단 역시 미개했던 당시는 차라리 뱃길이 훨씬 편했던 때문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말하지만,근대 기술 이전의 이 땅은 바로 그 많은 산 때문에 교통과 통신이 크게 장애받는 형편에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닷길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에서 쌀은 걸핏하면 수장 당하고 썩기 일쑤였다. 특히 이 뱃길에서 가장 험난한 코스는 바로 태안반도 서쪽 끝 안흥(安興) 앞 바다였다. 해마다 조운선의 조난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영조 4년(1728)에는 40여척이 침몰해 4만7000석이 수몰됐고 3년 만인 영조 7년(1731)에는 90척 이상의 침몰 사고도 일어났다. 그 많은 해난사고 가운데 특히 태종 3년(1403)에는 34척이 침몰하여 쌀 1만석 이상을 잃고,죽은 사람이 1000명을 넘는 사고도 있었다. 그해 5월5일자 '태종실록'에 기록됐으니,실제 사고는 4월 말이었을 듯하다. 사고가 모두 태안반도 서쪽 끝 안흥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그곳이 최고의 사고 다발(多發)지역이었다.
물살이 유난스럽게 빠르고 간만의 차가 심하며 무수한 암초가 널린 곳,이곳을 지나는 배들은 언제나 고사를 지내고 조심하지만 해난은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눈을 조금 내륙으로 돌리면 태안반도의 동쪽에는 남과 북에서 서로 뻗어 거의 이어질 듯 만(灣)이 마주 보고 있다. 남쪽에는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천수만(淺水灣)이 있고,북쪽에서는 50만㎾의 국내 최대 조력발전소를 건설하려는 가로림만(加露林灣)이 남으로 뻗어 있다. 이 두 만의 거리는 겨우 7km밖에 되지 않는다.
이를 남과 북에서 이어 운하를 파자는 계획은 고려 때부터 나오고 있었다. 지금 서산시와 태안군의 경계를 따라 물길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초 좌정승(좌의정) 하륜(河崙·1347∼1416)의 건의로 실제 태안운하 건설은 실행에 옮겨졌다. 공사는 지역민 5000명을 동원해서 진행돼 1412년(태종 12년) 2월 릴레이식 운하가 개통되기도 했다. 제대로 된 운하는 아니고,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몇 개의 호수를 파서 쌀을 실었다 풀었다 하는 과정을 6차례 거듭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배에 쌀을 실었다 풀었다 하며 호수 사이를 운반해 남에서 북으로 옮긴 세곡(稅穀)을 가로림만에서 받아 서울까지 운반하는 것이었다.
이듬해까지 이 계단식 운하는 시험 운영되었지만,그대로는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두 만 사이를 물길로 이어주는 정식 운하를 파려는 논의가 계속됐다. 1413년 가을에는 왕명을 받고 여러 신하들이 현장에 다녀왔으며,임금 자신도 가보겠다는 뜻을 밝힐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의 '실록'을 보면 태종이 현장에 간 것 같지도 않은 채,그 운하의 주창자 하륜이 죽은 1416년 이전에 이미 그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뒤 세조,중종,현종 때에도 이 운하 문제는 다시 논의(論議)되었지만 끝내 실행되지는 못하고 말았다.
1412년 하륜의 태안운하가 당시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흔들렸듯이,2007년의 경부운하 역시 비슷한 정치역학에 좌우될 듯하다. 그거야 어찌됐건 지금도 남아 있다는 하륜의 운하 유적을 복원해,관광과 교육 자료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은 경부(京釜)운하가 화제지만,우리 역사에도 운하 계획은 여러 번 있었다. 지난 1월에 출간된 성균관대 오호성 명예교수의 책만 보아도 태안(泰安)운하,용산(龍山)운하,그리고 김포(金浦)운하 등이 소개돼 있다.
오 교수의 '조선시대의 미곡 유통(米穀流通) 시스템'은 쌀이 당시 어떻게 전국에서 서울로 운송되고 유통되었는지 설명한다. 책 제목 푼수로는 '운하'란 별로 상관없을 듯하지만,사실은 바로 쌀의 유통 때문에 선조들은 이런 운하를 계획했다.
화폐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 쌀은 먹거리이며 동시에 '돈' 노릇도 했다. 전국에서 거둬들인 쌀은 배로 운반해 서울로 가져갔다. 도로도 형편없고,운송 수단 역시 미개했던 당시는 차라리 뱃길이 훨씬 편했던 때문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말하지만,근대 기술 이전의 이 땅은 바로 그 많은 산 때문에 교통과 통신이 크게 장애받는 형편에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닷길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에서 쌀은 걸핏하면 수장 당하고 썩기 일쑤였다. 특히 이 뱃길에서 가장 험난한 코스는 바로 태안반도 서쪽 끝 안흥(安興) 앞 바다였다. 해마다 조운선의 조난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영조 4년(1728)에는 40여척이 침몰해 4만7000석이 수몰됐고 3년 만인 영조 7년(1731)에는 90척 이상의 침몰 사고도 일어났다. 그 많은 해난사고 가운데 특히 태종 3년(1403)에는 34척이 침몰하여 쌀 1만석 이상을 잃고,죽은 사람이 1000명을 넘는 사고도 있었다. 그해 5월5일자 '태종실록'에 기록됐으니,실제 사고는 4월 말이었을 듯하다. 사고가 모두 태안반도 서쪽 끝 안흥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그곳이 최고의 사고 다발(多發)지역이었다.
물살이 유난스럽게 빠르고 간만의 차가 심하며 무수한 암초가 널린 곳,이곳을 지나는 배들은 언제나 고사를 지내고 조심하지만 해난은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눈을 조금 내륙으로 돌리면 태안반도의 동쪽에는 남과 북에서 서로 뻗어 거의 이어질 듯 만(灣)이 마주 보고 있다. 남쪽에는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천수만(淺水灣)이 있고,북쪽에서는 50만㎾의 국내 최대 조력발전소를 건설하려는 가로림만(加露林灣)이 남으로 뻗어 있다. 이 두 만의 거리는 겨우 7km밖에 되지 않는다.
이를 남과 북에서 이어 운하를 파자는 계획은 고려 때부터 나오고 있었다. 지금 서산시와 태안군의 경계를 따라 물길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초 좌정승(좌의정) 하륜(河崙·1347∼1416)의 건의로 실제 태안운하 건설은 실행에 옮겨졌다. 공사는 지역민 5000명을 동원해서 진행돼 1412년(태종 12년) 2월 릴레이식 운하가 개통되기도 했다. 제대로 된 운하는 아니고,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몇 개의 호수를 파서 쌀을 실었다 풀었다 하는 과정을 6차례 거듭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배에 쌀을 실었다 풀었다 하며 호수 사이를 운반해 남에서 북으로 옮긴 세곡(稅穀)을 가로림만에서 받아 서울까지 운반하는 것이었다.
이듬해까지 이 계단식 운하는 시험 운영되었지만,그대로는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두 만 사이를 물길로 이어주는 정식 운하를 파려는 논의가 계속됐다. 1413년 가을에는 왕명을 받고 여러 신하들이 현장에 다녀왔으며,임금 자신도 가보겠다는 뜻을 밝힐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의 '실록'을 보면 태종이 현장에 간 것 같지도 않은 채,그 운하의 주창자 하륜이 죽은 1416년 이전에 이미 그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뒤 세조,중종,현종 때에도 이 운하 문제는 다시 논의(論議)되었지만 끝내 실행되지는 못하고 말았다.
1412년 하륜의 태안운하가 당시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흔들렸듯이,2007년의 경부운하 역시 비슷한 정치역학에 좌우될 듯하다. 그거야 어찌됐건 지금도 남아 있다는 하륜의 운하 유적을 복원해,관광과 교육 자료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