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민 < 본사 주필 >

'정치적'이라는 낱말은 정치분야 이외의 현상에 대해 비유적으로 쓸 때는 대부분 부정적인 뜻으로 차용되는 경우가 많다. 사전적 의미는 '사무적이 아니고 흥정·변통에 의하는 모습'이라고 돼 있다. 말하자면 정상적인 절차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임기응변이나 임시변통으로 처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결정은 대부분 그로 인한 후유증(後遺症)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이 제기됐던 것도 상당부분 '정치적'인 면이 없지 않다는 게 많은 사람들이 품는 의문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외환위기 이후 금융회사 구조조정 과정에 참여해 '떼돈'을 번 론스타 펀드에 대해 이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속이 편할 리 없음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불법매각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주주 자격을 박탈하고,계약을 무효화시켜야 한다고 채근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국회 법사위는 지난 주말 외환은행 대주주인 론스타 펀드의 대주주 자격을 즉각 박탈하고 외환은행 매각 작업에 관련됐던 공직자 11명을 인사조치하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켜 본회의에 넘겼다. 말하자면 감사원 감사와 검찰의 수사내용을 바탕으로 정부 차원의 후속조치를 당장 취하라는 압박(壓迫)인 셈이다. 국회가 감사원 감사결과를 놓고 행정부에 대해 문책인사 등 명시적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비록 법률적 강제성은 없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입법부와 사법부가 서로 지켜야 할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정치 풍토(風土)이고 보면 참으로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우선 불법매각의 실체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정치적' 또는 '여론몰이식' 판단이 이뤄질 경우 그에 따른 후유증이 너무 클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매각 당시 외환은행 불법매각에 관련됐다는 공직자들은 모든 게 떳떳하다고 밝히고 있다. 또 재정경제부를 비롯한 금융정책당국도 당시로선 올바른 정책적 판단에 따라 적법(適法)하게 이뤄졌음을 누차 밝힌 바 있다. 더구나 이와 관련된 공직자를 비롯한 당사자들의 재판이 진행중인 상황이다. 그런데도 사법적 판단을 받아 명백(明白)한 사실관계를 규명하기도 전에 국회가 나서서 대주주 자격 박탈과 인사조치를 정부에 압박하는 것은 '월권적 협박'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다 심각히 걱정해야 할 것은 국가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경제가 '중년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외국인 혐오증'을 들었다. 글로벌 시대에 우리가 '외국자본을 홀대하는 나라'로 세계 각국에 인식될 경우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그 뿐만이 아니다. 금융당국이 주장하듯이 정책적 판단의 결과에 대해 사법적 잣대를 들이댈 경우 앞으로 정책당국자 어느 누구도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결단을 내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공직자 스스로 고백했듯이 미루고 숨기려 할 것은 당연하다. 역대 정부가 내세운 과감한 규제혁파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도 감사원을 비롯한 감독기관들의 과도한 감사 탓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분별 있는 국회라면 좀 더 신중히 판단해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한 특별조치 촉구결의안 같은 것은 내지 말았어야 옳다. 지금은 국회가 나설 때 아니다. 하기야 여당의 당의장을 지냈던 정치지도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이 한·미 FTA 체결을 반대한다며 단식농성이라는 정치쇼까지 벌이고 있는 마당이니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정말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한국은 세계로부터 따돌림당하는 이상한 나라로 전락(轉落)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