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는 영화 속 캐릭터와 이야기를 압축해 담아내기 위한 고도의 계산된 '미장센(mise en scene;영화에서 등장인물 배치나 도구·조명 등에 관한 종합적인 설계)'이다.

예전에는 영화에서 멋있는 장면 하나를 골라내 포스터 사진으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포스터 사진을 따로 찍을 만큼 중요성이 커졌다.

그런 면에서 영화 포스터 디자인 회사 '그림'의 배광호 대표(37)는 한 '장(張)'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영화감독은 두 시간 동안 극장 안에서 집중할 준비가 돼 있는 관객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들지만,영화 포스터 디자이너는 두 시간의 영화를 A2 크기의 종이 한 장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눈길이 스치는 '찰나'에 행인의 뇌리에 박혀야만 하는 것이다.

1년에 한국에서 개봉되는 영화는 대략 100편.15개의 영화 포스터 디자인 회사가 이 시장을 나누고 있다.

그 중 배 대표가 운영하는 '그림'이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편당 평균 3000만원에서 4000만원 사이의 작품비를 받는데,이 안에는 포스터 작업뿐 아니라 각종 홍보 전단지와 지하철·버스에 걸리는 POP(point of purchasing;구매하는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광고물) 디자인 작업까지 포함돼 있다.

배 대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음란서생''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비롯 60여개에 이른다.

'음란서생'에서는 출연 배우들이 '음란한 그림'이 그려진 서책,부채,거울을 들고 서 있게 했다.

'음란한' 물건을 손에 들고도 양반 특유의 당당한 표정을 짓게 해 영화의 해학적 분위기를 살렸다.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에서는 애정이 결핍됐을 때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 사람들의 특징을 살려 방 안에서 '시체놀이'를 하고 있는 두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줬다.

'음란서생'과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2006년에 각각 영화잡지 '프리미어'와 'FILM2.0'에서 주는 '올해의 포스터상'을 받았다.

배 대표는 미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한 방송 프로덕션의 애니메이션팀에서 일했다.

평소에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고 영화를 좋아하는 배 대표를 아는 지인이 1997년 처음으로 영화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맡겼다.

그 당시만 해도 포스터를 '디자인'한다는 개념이 막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첫 작품인 '모텔 선인장'과 '8월의 크리스마스'로 좋은 평가를 받고서도 일거리를 따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영화 제작자들이 포스터에 마케팅 비용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배 대표는 영화 포스터 작업의 매력에 빠져든 상태였다.

"영화 포스터를 만드는 것은 마치 배우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지 않으면 포스터에도 영화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을 수 없거든요."

영화마다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포스터 작업이 늘 새로울 수 있는 것도 배 대표의 마음을 끌었다.

"매번 바뀌는 영화 포스터 작업은 마치 각각의 다른 삶을 살아보게 만드는 것 같지요."

영화 포스터 작업이 아무리 좋았어도 생계를 꾸려가는 데는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아등바등하지 않아요.

당시의 생활이 고생스러웠다는 기억이 안 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거예요." 2000년 '그림'을 차린 다음에도 1년에 한 번씩은 이사를 다녀야 했지만 그때도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배 대표가 추구하는 회사 분위기도 직원들이 업무에 치이기보다는 대학 시절 몸 담았던 '동아리'의 분위기를 그대로 갖고 있는 곳이다.

그래야 아이디어도 더 많이 나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의 기발함은 '동갑내기 과외하기' 포스터를 계기로 업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포스터 작업들은 영화에서 사용하던 세트를 그대로 옮겨와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는 영화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광고 카피에서 촬영 스튜디오까지 모두 새롭게 제작했다.

아이디어를 끌어내기 위해 작업은 자유롭게 하되 영화 포스터가 지녀야 하는 마케팅적 측면을 철저히 지키는 것도 배 대표의 장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영화 티켓을 구매하는 파워가 남성보다는 여성에 절대적으로 쏠려 있기 때문에 '야한' 영화의 포스터를 만들 때도 여성 관객에 맞춰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또 한국 소비자들은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는 게 배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앞으로 영화 포스터 외에 '디자인'이라는 이름이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제품을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보는 것이 꿈이다.

"포스터 작업은 늘 클라이언트와 관객의 반응을 고려하면서 만들어야 해요.언젠가는 타인의 검열 없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만들고 싶어요."

글= 박신영 기자/사진=김영우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