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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자칼럼] 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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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에는 쌀 70가마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초대형 뒤주가 있다. 1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이 뒤주의 사연은 이렇다. 당시 정준섭은 조부 때부터 대를 이어온 토호로 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집 인심이 소문나 과객과 식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작은 궤짝으로 양식을 감당할 수 없자 그는 아예 마당 한쪽에 뒤주를 만들어 볏짚으로 지붕을 씌웠다고 한다.

    훈훈한 인심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운조루(雲鳥樓)에도 있다. 문화 류씨 10대 종가인 이 집에는 쌀 3가마가 들어가는 원통형 쌀뒤주가 있는데 뒤주의 문짝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쓰여있다. "누구나 뒤주를 열고 능히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의미다. 쌀 한 톨이 아쉬웠던 시절,주린 배를 움켜 쥐어야 했던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생명줄이나 다름 없었을 게다.

    전영택의 단편소설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화수분'도 우리의 도타운 인심을 엿보게 하는 단지다. 화수분은 그 안에 어떤 귀한 물건이든 넣어두면 줄기는커녕 계속 나온다는 도깨비 그릇으로,항상 차고 넘치는 인정 또한 화수분으로 곧잘 표현되곤 한다.

    화수분 같은 쌀 뒤주가 전국 여기저기에 놓여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전주와 인제 등지의 일선 행정기관들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뒤주와 항아리를 설치하자,독지가들이 다투어 쌀을 채워 놓는다는 것이다. "사랑이 가득 담긴 쌀,맘 편히 퍼가세요" 하는 글귀가 무척이나 정겹게 다가오면서,아낌없이 주고 베풀려는 마음이 선연히 읽혀지는 듯하다.

    전통적으로 이웃 사이의 나눔은 우리네 큰 미덕이었다. "열 숟갈을 모아 밥 한 그릇을 만든다"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은 이러한 미덕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부자라고 하는데 부자가 이토록 많았나 싶다.

    광이나 마루 한구석에서 자물통으로 잠가졌던 뒤주가 공공장소로 나와 따뜻한 세상 인심을 느끼게 하고 있으니,오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가 흐뭇한 기색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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