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秉柱 < 서강대 명예교수 >

땅 속에 굴을 파서 지렁이·벌레 따위를 먹고 사는 두더지가 세상 넓은 줄 알 리 없다. 눈이 퇴화된 데다 근시이기도 하다. 암벽 등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사는 황조롱이는 높이 날며 넓은 시야 속에 포착되는 두더지·들쥐 따위를 잡아 먹고 사니까,좀 넓은 세상을 아는 셈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높게 날아도 비행기보다는 낮고,사냥총 앞에는 무력하다. 그렇게 잘난 인간이 사는 마을도 제방(堤防)에 뚫린 두더지 굴 탓으로 홍수 물에 잠길 수 있다.

눈높이,그것은 세상사를 관찰하고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눈높이가 낮으면 애국심의 이름으로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국 나라 이익에 도움은커녕 손해를 끼칠 수 있다.

외환은행 매각 의혹사건을 보자. 아무도 사직당국의 애국충정과 노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공소사실의 진실 여부는 법정에 맡기고 여기서는 국익 차원에 초점을 맞춰 보자.

2003년 금융시장이 불안한 가운데 국내 매수자가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론스타가 인수자로 선정됐다. 매각 당시 론스타가 이중과세방지 국제협정의 수혜자임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추후 은행경영 실적이 어찌될지 예측 불가능한 리스크를 론스타가 안았다. 론스타의 은행경영이 부실했다면,그리고 매각차익이 미미했다면 인수과정이나 퇴출과정에 아무런 시비도 없었을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론스타 퇴출과정에서 예상외로 막대한 이익이 발생했다. 그래서 세금 한 푼 안내고 '먹튀' 한다고 배아픈 국민정서가 발동했고,이에 밀려 사직당국이 움직였다. 1997년 환란(換亂) 때처럼 국민정서의 제단에 바쳐질 희생양이 필요했다.

론스타는 이래저래 손해 볼 것 없어 보인다. 매각이 미뤄진 가운데 올해도 영업실적이 좋아 두둑한 배당을 챙길 것이고,다시 국내외에서 매수 대상자를 구하는 동안에 팔아버릴 자산처분이익도 짭짤할 것이다. 공소장에 매각가격 산정 잘못으로 지적된 돈이 고스란히 국민의 주머니로 들어올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손익계산을 추려보자. 국민정서 달래기에는 좀 도움이 될 것 같다. 앞으로 외국 자본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나라로 경원(敬遠)된다면 플러스인가 마이너스인가? 국제금융가에서 비(非)우호적 투자대상국으로 치부될 것이 분명하다. 현재는 외환보유가 넉넉해 당분간 외환부족 걱정은 접을 수 있지만,돌고도는 국제금융시장의 수년 후 상황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란 말인가?

보다 큰 손실이 있다. 금융정책·규제당국이 자발성과 민첩성을 버리고 몸을 움츠리는 모습이 엿보인다. 선진국은 유연한 규제당국의 도움으로 금융혁신에 매진한다. 국내 금융당국은 국민정서를 앞세운 NGO·감사원·검찰·국회가 지겨워 복지부동(服地不動)을 선택한다. 시장에 어떤 돌발상황이 벌어져도 할 일을 미루고 덮어 숨기며,팔 걷고 앞장 서지 않고 자리 지키며 보신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교훈이 학습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시장일꾼의 손발 묶는 버릇이 있는 규제당국이 아니던가? 금융계의 혁신숨통을 바짝 조이는 방향으로 학습효과가 전달될 것이다. 글로벌시대 국내 금융계는 나라 안팎의 시장에서 선진국의 동업계와 생존경쟁을 해야 하지만,국내외 정책당국의 대조적인 규제자세 때문에 시장 경쟁에서 싸우기도 전에 패배가 예정돼 있다. 이러한 무형(無形)의 손실은 론스타의 매각차익을 훨씬 능가할 만큼 클 것이다.

한·미 FTA문제도 그렇다. 소수 이익집단의 두더지 행태가 대다수 국민의 이익에 상치되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대 시위에 앞장선 제조부문 노조들을 두더지랄 수밖에 없다. 반미 이외에 다른 명분이 있나?

개도국 시절의 안목이 세계 11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현재에도 적합할 수 없다. 이제는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세상을 굽어 볼 수 있어야 한다. 두더지처럼 굴 파기에 열심이다 보면 자기 사는 제방 허물고 홍수에 떼죽음한다. 크게 넓게 세상을 내다보는 개몽된 애국심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