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희망과 나눔의 앙상블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앙상블'(ensemble)이란 말은 외래어이면서도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다.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식자층은 한국말에 외래어를 섞어 쓰는 것을 유식한 것으로 알았는데,앙상블이란 말도 그런 종류의 말 중 하나였다. 이를 우리말로 하면 '함께' '동시에'라는 의미이고 나아가 '통일'과 '조화로움'을 지칭한다. 음악에선'복수에 의한 연주',곧 중창이나 중주를 뜻하는데 이러한 연주를 평할 때 '앙상블이 좋다',혹은'앙상블이 나쁘다'는 식으로 표현하곤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언뜻 서로 달라 보이는 요소들이 극도의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창출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앙상블의 달인은 뭐니뭐니 해도 예수님이요 하느님이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창출해내신 세상은 그 얼마나 조화로운가! 비록 인간이 섣부르게 발달시킨 물질문명으로 인해 그 조화로움이 자주 깨지곤 하지만,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생물체로부터 태양계와 우주에 이르는 거시 세계까지 세상 만물은 더할 나위 없는 조화로움 속에서 최고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창조의 절정인 인간만 봐도 그러하다. 원죄로 손상되기는 했지만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그 얼마나 세련된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하느님의 창조가 장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예수님이 이뤄내는 앙상블은 섬세하고 다정다감하다. 온전히 하느님이시면서 온전하게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무한한 존재이면서도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취하셔서 구유에 오신 예수님의 성탄은'무한'과'유한'이라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뤄 만들어낸 지고의 앙상블이 아닐 수 없다.
아기 예수의 성탄은 이처럼 무한과 유한의 지평이 합쳐지는 지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교는 성탄을 일러 '강생(降生)' 혹은 '육화(肉化)'라고 부른다. 하느님이 인간으로 태어남을 일컫는 강생으로부터 인간 구원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성탄절만 되면 "온 누리에 희망과 축복을!"이라는 인사말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이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에 인류는 그분의 축복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바로 성탄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래서 성탄은 무엇보다도 먼저 '희망'의 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서도 가장 누추한 곳,짐승 먹이를 담아두는 그릇인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대개 어느 나라에나 전해지는 전설과 신화를 보면 위대한 인물의 탄생은 장엄한 서사로 꾸며진다. 하지만 인간 중에서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요 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탄생은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태어났다. 이보다 더 겸손하고 이보다 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러기에 성탄은 부유하고 권세를 가진 이들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욱 축복이 되는 사건이다. 예수님이 연주하시는 최고의 앙상블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구원의 앙상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무한과 유한의 앙상블은 가장 부요하고 가장 높은 권세를 지니고도 구유에 태어나시는 절정의 겸손,그리하여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초절정의 앙상블로 이어진다.
자,이제는 우리 모두 아기 예수의 겸손과 사랑에 화답할 때이다. 성탄이 준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에 '나눔'으로 답해야 한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던져주신 예수님께,우리는 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눔으로써 우리만의 앙상블을 연주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에게'나눔'은'희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성탄은'희망'과'나눔'이 교류하며 조화를 이루는 따뜻한 절기가 돼야 한다.
흥청망청 온갖 술자리와 고가의 선물로 소비주의 사회의 폐해를 몸소 실천(?)하지 말 것이며,예수님이 연주하신 그 아름다운 조화의 선율에 화답하는'희망'과 '축복'그리고'나눔'이란 악기로 소박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우리들의 앙상블을 연주해 보자.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앙상블의 달인은 뭐니뭐니 해도 예수님이요 하느님이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창출해내신 세상은 그 얼마나 조화로운가! 비록 인간이 섣부르게 발달시킨 물질문명으로 인해 그 조화로움이 자주 깨지곤 하지만,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생물체로부터 태양계와 우주에 이르는 거시 세계까지 세상 만물은 더할 나위 없는 조화로움 속에서 최고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창조의 절정인 인간만 봐도 그러하다. 원죄로 손상되기는 했지만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그 얼마나 세련된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하느님의 창조가 장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예수님이 이뤄내는 앙상블은 섬세하고 다정다감하다. 온전히 하느님이시면서 온전하게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무한한 존재이면서도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취하셔서 구유에 오신 예수님의 성탄은'무한'과'유한'이라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뤄 만들어낸 지고의 앙상블이 아닐 수 없다.
아기 예수의 성탄은 이처럼 무한과 유한의 지평이 합쳐지는 지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교는 성탄을 일러 '강생(降生)' 혹은 '육화(肉化)'라고 부른다. 하느님이 인간으로 태어남을 일컫는 강생으로부터 인간 구원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성탄절만 되면 "온 누리에 희망과 축복을!"이라는 인사말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이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에 인류는 그분의 축복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바로 성탄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래서 성탄은 무엇보다도 먼저 '희망'의 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서도 가장 누추한 곳,짐승 먹이를 담아두는 그릇인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대개 어느 나라에나 전해지는 전설과 신화를 보면 위대한 인물의 탄생은 장엄한 서사로 꾸며진다. 하지만 인간 중에서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요 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탄생은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태어났다. 이보다 더 겸손하고 이보다 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러기에 성탄은 부유하고 권세를 가진 이들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욱 축복이 되는 사건이다. 예수님이 연주하시는 최고의 앙상블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구원의 앙상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무한과 유한의 앙상블은 가장 부요하고 가장 높은 권세를 지니고도 구유에 태어나시는 절정의 겸손,그리하여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초절정의 앙상블로 이어진다.
자,이제는 우리 모두 아기 예수의 겸손과 사랑에 화답할 때이다. 성탄이 준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에 '나눔'으로 답해야 한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던져주신 예수님께,우리는 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눔으로써 우리만의 앙상블을 연주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에게'나눔'은'희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성탄은'희망'과'나눔'이 교류하며 조화를 이루는 따뜻한 절기가 돼야 한다.
흥청망청 온갖 술자리와 고가의 선물로 소비주의 사회의 폐해를 몸소 실천(?)하지 말 것이며,예수님이 연주하신 그 아름다운 조화의 선율에 화답하는'희망'과 '축복'그리고'나눔'이란 악기로 소박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우리들의 앙상블을 연주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