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필의 대명사는 그 유명한 '시라노 드 벨주락'일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시인검객 시라노는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기형적으로 큰 코 때문에 다가서지 못한다. 잘생긴 부하 크리스티앙 역시 그녀를 좋아한다는 걸 안 그는 언변도 글솜씨도 없는 크리스티앙 대신 감미롭고 절절한 연애편지를 써준다.

크리스티앙이 록산느와 결혼한 뒤에도 계속 편지를 대필하던 시라노는 죽기 직전에야 그녀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날 밤 기억해? 크리스티앙이 네 창 밑에 서있던 그 밤. 내 인생이 바로 그거야. 내가 어두운 그늘 속에 혼자 남아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날 딛고 영광의 입맞춤을 따냈지."

진짜 사랑이 엉뚱한 이였음을 안 록산느의 가슴은 찢어지지만 사태는 돌이킬 수 없다. 시라노라는 실존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한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과 이를 다룬 영화의 내용이다. 비극은 남 앞에 나서기 힘들었던 시라노와 번듯한 얼굴을 앞세워 남의 것을 제것화한 크리스티앙,진실을 볼 줄 몰랐던 록산느 등 셋의 합작품이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뜬 한젬마씨의 책들이 대필 논란에 휩싸였다. 무엇이 그리고 어디까지가 대필인가를 규정하는 일은 어렵다. 글쓰기를 본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 제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지니고 있어도 이를 일반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일은 간단하지 않은 까닭이다.

유명인사의 자서전이 남의 손을 빌리는 수가 많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고,전문가 칼럼 또한 도우미 혹은 매체 편집자의 다듬질을 필요로 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자기 글이라면 적어도 발상과 인용,생각은 자신의 독창적인 것이고 남에게 부탁하는 건 서툰 문장이나 문맥 손질에 국한돼야 한다.

대필은 대필자와 의뢰자,조금만 살펴보면 진위를 알 수 있는데도 드러난 것만 보는 독자의 무심함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시라노의 비극 요인과 닮아 있다. 다른 점이라면 이 모든 걸 기획하고 감독한 출판사라는 연출자가 있는 것이랄까. 이번 대필 논란이 기획출판의 문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됐으면 싶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