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삼성과 현대차 그룹의 지배구조를 현재의 환상형 순환출자 구조에서 지주회사 체제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삼성에 대해서는 전자 생명 에버랜드로 그룹을 분할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도 한다. 자본의 국적조차 사라진 지 오래인 이 개명천지에 낡은 연대기에나 나올 법한 기업 정책을 지금 우리는 듣고 있다. 제멋대로 기업의 소유구조를 정의하고 법제화하기에 이른다면 이는 우선 정부의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관념의 포로가 되어 현실을 재단하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요 설익은 이론을 곧장 법제화하려는 원리주의적 법률관이 지배하는 공정위라면 차라리 폐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정위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도 지주회사 체제가 좋다는 요지의 주장을 한다지만 악어의 눈물같은 논리는 듣기에 민망하다. 우리 정부가 언제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에까지 이토록 자상한 보살핌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차등 의결권은 물론이요 황금주나 포이즌필 등의 허다한 경영권 방어장치 중에 단 한가지라도 한국 기업에 허용된 것이 있다면 공정위의 '정의의 사도'들은 부디 말을 좀 해달라. 멀쩡한 의결권도 갖은 명목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 공정위다. 어떤 지배구조가 더 정의롭고 효율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학문적 논의의 대상일 뿐이요 여기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론적 결론조차 내려진 바 없다. 더구나 우리는 진화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세계의 기업들은 오늘도 스스로 형태와 구조를 바꾸어 가는 무정형적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피라미드는 물론이고 일부 나라에선 상호출자까지 허용되어 있는 것이 현대 소유구조의 다양한 모습이다. 복잡한 출자 형태와 지분구조를 큰 종이 한장에 다 그려 낼 수 없는 것은 세계적 대기업의 공통된 모습이다.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는 시민단체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오히려 단순하다.

더구나 공정위 자신이 지주회사 체제를 부정하고 그것을 금지했던 것이 불과 몇년 전이다. 이제와서 지주회사 체제를 정답이라고 우기기로 든다면 몇년 후에는 또 무슨 궤변을 들고 나올 것인지 궁금하다. 한동안은 투자와 출자가 다르다고 떼를 쓰더니 이제 더는 고집할 것이 없어 지주회사를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작은 침대 위에 사람을 눕혀놓고 침대보다 긴 다리는 잘라내고 짧은 다리는 잡아 늘렸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는 전설과 우화 속에서나 들어보았던 것이다. 지금 공정위가 바로 프로크루스테스의 모습이다. 출총제를 폐지하라는 요구에 순환출자 금지를 들고 나오는, 억하심정 식의 태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막가기로 든다면 폐지해야 할 것은 출총제가 아니라 바로 공정위다. 공정위의 그간의 태도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공정위의 요구에 따라 대기업들이 지주회사제를 받아들인다면 공정위는 바로 그 다음날로 또 무언가 괴이한 요구조건을 내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지주사의 역할을 하는 자선재단 등의 주식의결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정부에 적잖이 관여하고 있다.

그리 되면 워런 버핏도 빌 게이츠 재단도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 자선재단도 그런 상황인데 나중에 놀이공원 따위가 제조업의 지주회사가 될 수 없다는 기상천외한 규정을 들고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어이없는 출총제가 연장될 때에도 그랬었다. 공정위는 기업들이 출총제 해제 조건을 충족하자 의결권 승수와 괴리율 같은 조건을 다시 내걸었다. 그 어떤 그룹에 대해서건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는 것과 그 판단으로 규제하고 벌주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주식 투자자들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역시 오로지 주주들이 선택할 문제이지 정부가 그것을 판단할 이유가 없다. 조직이 있다보니 일거리를 만들고 있는 데 불과할 테다.

하기야 희망 사항과 그것의 실현 조건을 혼동하는 것은 부동산정책에서부터 대북정책에 이르기까지 이 정부의 고질병의 하나다. 그러니 제멋대로 지배구조를 정의한 다음 이를 곧바로 법제화하자고 달려드는 공정위만 나무랄 일도 아니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