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동인 < 사회부장 >

프랑스사람들은 병인양요(1866) 때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191종 297권)나 대한제국 말기 몰래 가져간 세계최고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돌려달라면 별별 이유를 대며 시간만 끈다. 하지만 프랑스 도서관 실무자들은 "이런 귀한 문화재를 한국 같은 나라에서 과연 제대로 보관할수 있을까"하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세계적인 문화재를 잘 간직하겠다는 것은 고맙지만, 결국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을 믿지 못하겠다는 오만함에 다름 아니다.

그런 프랑스의 서울주재 경찰관계자가 지난주 방배경찰서를 찾았다. 자국민이 저지른 서래마을 영아살해사건을 한국 경찰이 철저하게 수사해준 데 대한 감사 차원에서다. 사건 초 한국의 수사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던 프랑스 여론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이번 일로 프랑스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우리 경찰의 첨단 수사능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유전자감식에서 사이버범죄추적까지 외국 경찰들의 학습코스가 되었을 정도다. 경찰 내부에선 또 하나의 한류문화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사회 전반이 이 같은 과학적인 사고와 철학으로 무장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을 핵실험이 한반도 안에서 이뤄졌는데도 우리는 핵실험장소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원자력 강국에서 핵맹(核盲)으로의 추락. 국제적인 망신을 탓하기에 앞서 국가 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아찔한 순간이었다. 지난 7월 2000억원을 들여 발사한 아리랑 2호 위성도 핵실험 장소를 찾는데 도움이 못됐다니 너무도 부실한 과학정보 시스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 사회에 과학 마인드가 약하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TV드라마를 봐도, 서점을 가도 금방 알 수 있다. 미국에선 CSI수사대 같은 첨단 과학수사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지만 우리나라 TV엔 지금도 사극이나 사랑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코미디도 "그까이꺼 대충∼"식의 프로그램이 인기다.

반스&노블이나 보더스 같은 미국의 대형 서점에는 어딜 가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코너,특히 어린이용 코너는 공상·과학도서가 주류를 이룬다. 과학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데 과학도서만큼 좋은 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점에서 과학도서를 찾긴 매우 힘들다. 어린이코너조차 과학책 대신 삼국지 같은 중국의 역사, 그것도 흥미 위주의 야사(野史)를 다룬 책들이 자리잡고 있다.

'삼국지 문화'탓인지 정치인들도 국민들에게 미래의 정책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보다는 알쏭달쏭한 고사성어를 즐겨 쓴다. 황우석 신화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도 따지고 보면 이처럼 사실확인과 과학적인 검증절차를 소홀히 하는 주먹구구식 문화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젠 좀 달라져야 한다.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정부부터 명분이나 감정을 앞세운 '삼국지'식의 결정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철저하고 과학적인 정보가 정책수립과 집행의 바탕이 돼야 한다. 미국의 CSI수사대처럼 우리에게도 '서래마을 수사팀'이 있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의 키워드도 '대충대충'에서 '과학적'으로 바뀌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