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흙을 밟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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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우 < 소설가 >
돌아봐도 내다봐도 아파트뿐인 콘크리트 공화국.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본다.
사대문 안이건 사대문 밖이건 흙을 밟을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일산에 사는 사람이 아침에 버스를 타거나 자가용으로 광화문으로 출근을 한다고 가정하면 그 과정에 흙을 밟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차례도 없다. 보도블록,포장도로,빌딩,지하도,주차장,공원에 이르기까지 도시인들은 철저하게 흙으로부터 차단된 삶을 살고 있다. 이게 뭔가.
젊은 사람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에 반공교육을 받았다.
그때 북한에서는 '전 국토의 요새화(要塞化)'가 진행중이라고 배웠다.
'전 국토의 요새화.' 어린 나에게는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전 국토를 요새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상상을 할 수 없어서였다.
그럼 북한 사람들은 모두 두더지나 들쥐들처럼 땅속에 들어가 사나?
요즘 나는 한국의 국토를 보며 어린 시절의 반공 교육을 상기한다.
전 국토의 요새화가 아니라 전 국토의 아파트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와 농촌은 물론 산에도 들에도 강변에도 해변에도 온통 아파트 천지다.
작년 한 해 공급된 46만3641가구중 41만5511가구가 아파트였다.
열 가구중 아홉 가구가 아파트인 셈이다.
나머지 주택도 아파트와 비슷한 연립,다가구,다세대 주택이니 아파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단독주택 멸종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는 대한민국의 심장이다.
거기에서 자아(自我)가 탄생하고,명예가 탄생하고,권위가 탄생한다.
좁은 평수는 명함도 들이밀지 못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아파트를 통해 입신출세 혹은 양명(揚名)의 길로 나서야 한다.
그렇게 금수강산을 파헤치며 아파트를 지어대 주택 공급률은 100%를 초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는 집 없는 가구가 절반 가까이 된다.
집이 모자라는 게 아니라 집을 취득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불합리하다는 걸 정책 입안자들은 외면하는 것이다.
아무리 지어도 해결되지 않는데 이렇게 닥치는대로 전 국토를 아파트로 뒤덮는 일이 과연 온당할까.
아파트로 도배된 한국의 풍경은 끔찍하다.
이런 풍경을 가진 나라는 지구상에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다.
시골과 도시를 가릴 것 없이 이제는 아파트 풍경이 한국의 풍경을 대변한다.
풍경만 대변하는 게 아니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와 사고방식까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단지(團地) 중심적으로 살고, 단지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단지 중심적으로 반응하는 호모 아파티쿠스(Homo Aparticus).
주택은 삶의 터전이다. 가족이라는 최초의 공동체가 기거하는 곳이고 그곳에서 인간과 인생이 사랑의 싹을 틔운다.그것이 한 국가의 문화와 전통의 뿌리가 된다.
예전 우리의 단독주택 전통문화에서는 가족이 함께 해야 할 일이 많았고,나아가 이웃들과 소통할 수 있는 주택의 공간도 많았다.
그곳이 바로 마당이고 마루였다.
아파트는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숙소의 기능이 강한 공간이다.
핵가족 시대의 일가족은 아침에 헤어지고 밤에 만나 잠을 자는 이합집산의 공간으로 아파트를 활용한다. 아파트 구조 자체가 열림이 아니라 닫힘을 지향하는 공간이다. 온갖 변형을 꾀하는 내부 구조는 밖이 아니라 안으로 집중하려는 가족 이기주의의 구심력을 반영한다.그래서 아파트적 사고는 평형 중심으로,동네 중심으로,학군 중심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아파트는 한국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그렇다.
우리는 날마다 아파트를 보고 사니까 마비가 돼서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풍경을 처음 와서 보는 외국인들의 눈에는 가관(可觀)이 아닐 수 없을 터이다.
서울 압구정동의 아파트 단지를 본 어느 독일인 교수는 "여기가 서울의 슬럼가냐?"고 물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한 도시계획가가 서울 반포의 5000분의 1 축적 지번 약도를 보고 "한강변의 군사기지 규모는 정말 대단하군요"라고 말했다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빨리 아파트 밀림에서 벗어나 흙을 밟으며 살고 싶다.
흙!…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돌아봐도 내다봐도 아파트뿐인 콘크리트 공화국.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본다.
사대문 안이건 사대문 밖이건 흙을 밟을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일산에 사는 사람이 아침에 버스를 타거나 자가용으로 광화문으로 출근을 한다고 가정하면 그 과정에 흙을 밟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차례도 없다. 보도블록,포장도로,빌딩,지하도,주차장,공원에 이르기까지 도시인들은 철저하게 흙으로부터 차단된 삶을 살고 있다. 이게 뭔가.
젊은 사람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에 반공교육을 받았다.
그때 북한에서는 '전 국토의 요새화(要塞化)'가 진행중이라고 배웠다.
'전 국토의 요새화.' 어린 나에게는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전 국토를 요새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상상을 할 수 없어서였다.
그럼 북한 사람들은 모두 두더지나 들쥐들처럼 땅속에 들어가 사나?
요즘 나는 한국의 국토를 보며 어린 시절의 반공 교육을 상기한다.
전 국토의 요새화가 아니라 전 국토의 아파트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와 농촌은 물론 산에도 들에도 강변에도 해변에도 온통 아파트 천지다.
작년 한 해 공급된 46만3641가구중 41만5511가구가 아파트였다.
열 가구중 아홉 가구가 아파트인 셈이다.
나머지 주택도 아파트와 비슷한 연립,다가구,다세대 주택이니 아파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단독주택 멸종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는 대한민국의 심장이다.
거기에서 자아(自我)가 탄생하고,명예가 탄생하고,권위가 탄생한다.
좁은 평수는 명함도 들이밀지 못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아파트를 통해 입신출세 혹은 양명(揚名)의 길로 나서야 한다.
그렇게 금수강산을 파헤치며 아파트를 지어대 주택 공급률은 100%를 초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는 집 없는 가구가 절반 가까이 된다.
집이 모자라는 게 아니라 집을 취득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불합리하다는 걸 정책 입안자들은 외면하는 것이다.
아무리 지어도 해결되지 않는데 이렇게 닥치는대로 전 국토를 아파트로 뒤덮는 일이 과연 온당할까.
아파트로 도배된 한국의 풍경은 끔찍하다.
이런 풍경을 가진 나라는 지구상에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다.
시골과 도시를 가릴 것 없이 이제는 아파트 풍경이 한국의 풍경을 대변한다.
풍경만 대변하는 게 아니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와 사고방식까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단지(團地) 중심적으로 살고, 단지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단지 중심적으로 반응하는 호모 아파티쿠스(Homo Aparticus).
주택은 삶의 터전이다. 가족이라는 최초의 공동체가 기거하는 곳이고 그곳에서 인간과 인생이 사랑의 싹을 틔운다.그것이 한 국가의 문화와 전통의 뿌리가 된다.
예전 우리의 단독주택 전통문화에서는 가족이 함께 해야 할 일이 많았고,나아가 이웃들과 소통할 수 있는 주택의 공간도 많았다.
그곳이 바로 마당이고 마루였다.
아파트는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숙소의 기능이 강한 공간이다.
핵가족 시대의 일가족은 아침에 헤어지고 밤에 만나 잠을 자는 이합집산의 공간으로 아파트를 활용한다. 아파트 구조 자체가 열림이 아니라 닫힘을 지향하는 공간이다. 온갖 변형을 꾀하는 내부 구조는 밖이 아니라 안으로 집중하려는 가족 이기주의의 구심력을 반영한다.그래서 아파트적 사고는 평형 중심으로,동네 중심으로,학군 중심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아파트는 한국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그렇다.
우리는 날마다 아파트를 보고 사니까 마비가 돼서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풍경을 처음 와서 보는 외국인들의 눈에는 가관(可觀)이 아닐 수 없을 터이다.
서울 압구정동의 아파트 단지를 본 어느 독일인 교수는 "여기가 서울의 슬럼가냐?"고 물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한 도시계획가가 서울 반포의 5000분의 1 축적 지번 약도를 보고 "한강변의 군사기지 규모는 정말 대단하군요"라고 말했다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빨리 아파트 밀림에서 벗어나 흙을 밟으며 살고 싶다.
흙!…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