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97세를 일기로 타계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하버드대 교수가 '풍요한 사회'를 처음 썼을 때 미국은 그야말로 풍요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이젠하워 시대를 미국의 황금기라고도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 뒤에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했으니,빈부 격차와 인종 갈등 같은 사회문제가 잠재해 있었다.

주류경제학이 상대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둔감할 때 갤브레이스는 이것이 장차 미국을 갉아먹는 요소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아마도 캐나다의 농촌에서 태어나 농대를 나와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의 아웃사이더적인 배경도 이러한 인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고뇌가 탄생시킨 것이 필생의 역작인 이 책이다.

그 자신도 가장 아끼는 저작이라며 이 책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었다.

이번에 번역된 이 책은 1998년 수정 증보한 출간 40주년 기념판이다.

1958년에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기본 철학에 공감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갤브레이스의 하버드대 제자였던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었다.

몇 년 뒤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미국 여러 지역의 가난에 충격을 받고 '가난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때 이 책이 정책의 철학을 제공했다.

이후 린든 존슨 행정부의 '위대한 사회' 정책도 이 책의 철학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갤브레이스도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시절 경제자문으로서 또는 인도대사로서 현실문제에 적극 참여했다.

선량한 도덕론자였던 그는 이 책에서 풍요 속에 살게 된 우리가 '그 혜택과 문화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본주의사회의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공공선의 증진보다는 개인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간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개인의 자유'보다 '공공(公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그의 평생 지론이 됐다.

그는 시장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불신했다.

대신 선한 의도를 가진 큰 정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온정적 진보주의의 입장을 강하게 개진했다.

그가 내세운 해법은 높은 세금과 큰 정부,정부의 개입,그리고 사회복지 강화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려 했던 정책들은 결국 처참히 실패했다.

그가 꿈꾸었던 사회복지국가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의존성을 심화시켜 가난과 불평등을 악화시켰고,만성적인 재정적자를 야기했으며,궁극에는 도덕과 자율성의 붕괴를 가져왔다.

갤브레이스도 개정판에서 '정부가 개입해서 빈곤층을 보조하면 개인의 노력과 의지를 꺾게 돼서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인식이 이토록 널리 확산될 줄 몰랐다'는 말로 자신의 곤혹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그의 사상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중요성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한 권의 책이 한 시대에 영향을 미친 정도로는 이 책을 능가할 만한 경우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명제임에 분명하다.

단지 방법론에서의 이견이 존재할 뿐이다.

무절제한 성장 지상주의와 그것이 필연적으로 동반할 환경 파괴를 비판하고 절제된 사회와 공공선을 지향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곱씹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더군다나 통제되지 못하는 욕망과 이기주의가 분출하는 한국 사회에 이 책은 많은 교훈을 줄 것이다.

321쪽,1만3000원.

< 강규형 명지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