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보다 제도가 중요하다"는 요지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언급은 여당의 지방선거 참패에 대한 청와대의 인식과 향후 국정운영 방향을 함축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번 5.31 지방선거 결과는 민심의 흐름이 반영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보다는 기존의 정책과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것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거 다음날인 1일 노 대통령이 선거결과에 대해 "민심의 흐름으로 받아들인다"면서 "그동안 추진해온 정책과제들을 충실히 최선을 다해 이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빚어졌던 패인 분석과 처방에 관한 '혼선'을 직접 정리하고 나선 셈이다.

해석에 따라선 선거결과에 크게 개의치 않고 '마이웨이'를 계속 하겠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노 대통령의 이번 언급은 그동안 수차례 표명된 바 있어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8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민심과 그 시기 국민들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표출되는 민심을 다르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청와대 기자단과의 산행에선 "임기 2년을 갖고 중간평가를 한다면 이미지 평가일 수밖에 없다"며 현행 헌법이 안고 있는 제도의 허점과 후진 정치문화를 지적하기도 했다.

즉 "한두번 선거로 나라가 잘 되고 못되는, 어느 당이 흥하고 망하고 그런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는 노 대통령의 언급은 민심의 한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갑론을박하기 보다는 평소 신념대로 "미래 선진한국을 위해 뚜벅뚜벅 갈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재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토론회에서 노 대통령이 선진화된 제도의 중요성과 함께 캐나다의 브라이언 멀루니 전 총리가 개혁을 추진하다 민심의 역풍을 맞았던 사례를 새삼 재론한 것도 미래에 맞춰져 있는 자신의 시각과 의중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멀루니는 1988년 총선에서 169석을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로 집권했지만 모든 업종으로 7~10%의 부가가치세를 확대하는 내용의 세제개혁을 밀어붙였다가 민심의 역풍을 맞고 1993년 선거에서는 불과 2석만 남기고 전멸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그를 "미래를 보는 지도자"로 평가하면서 "내 임기동안 욕을 먹더라도 미래를 위해 옳은 일이라면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관철하겠다"고 밝혔고, 지방선거 후 첫 공식석상이었던 이번 토론회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재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선거에 참패한 여당에 "멀리 보고 지혜를 모으자"고 주문한 것은 단순히 민주당과의 통합이나 인위적 정계개편에 반대한다는 차원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현실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의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 당정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라는 해석이 더욱 명료해진 셈이다.

노 대통령이 선거 직후 사회양극화 해소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 주요 국정과제의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태도에는 참여정부가 추진해온 개혁정책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특히 불리한 언론환경에서 비롯된 국민과의 소통의 단절이 결국 선거패배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노 대통령 자신은 "내겐 중요하지 않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정책홍보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고, 그래서 선거에서 패배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고, 부동산 세제개혁에 대한 일부 언론의 비판을 겨냥해 "한가지 정부의 정책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할 때에만 그 정보가 나왔다가 정책이 결정되면 정부에 비판을 가하는 것은 아닌지"라며 유감을 표한 것이 이를 입증하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선거 패배에 대한 청와대의 진단이 여당과 '온도차'를 느끼게 할 만큼 안이하다는 비판을 불러올 빌미를 줄 수 있는 데다, 향후 대책을 둘러싼 당청간 인식의 괴리가 깊다는 점을 확인시켜줬다는 점에서 당청 갈등의 촉매제로 작용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여당에 대한 민심이반 원인으로 지적되는 부동산 세제정책만 하더라도 당내에선 기조는 유지하되 부분적인 손실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지만, 노 대통령은 "무조건 대안 없이 반대를 하면 결국 투기꾼의 승리가 되는 것 아니냐"며 부동산 정책기조 변화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기자 j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