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안절부절못하고 문밖을 기웃거리거나 우편함을 자주 뒤질 때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부친 성적표를 부모 몰래 받아보려는 노력이다.

시험점수를 들키면 날벼락이 떨어질 테니 어떻게든 감췄다 살짝 확인도장을 찍어가려 전전긍긍하며 들락날락하는 것이다.

"왜 그러니" 물으면 짐짓 태연한 척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속이 얼마나 탈지는 안봐도 뻔하다.

초인종 소리만 나도 화들짝 달려나가고,행여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할까 벨이 울리기 무섭게 전화기를 받아들던 기억이 생생한데 어떻게 그 조마조마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모르랴.

가슴 졸인 보람도 없이 결국 들켜서 혼나고 나면 차라리 속이 시원해지면서 "어차피 야단맞을 것 빨리 맞을 걸" 후회했던 것 또한 안다.

막상 닥치면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고 따라서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일도 언제 내 차례일까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자면 두려움으로 인해 진이 다 빠지는 수가 많다.

피할 수 없는 일을 기다리는 건 이렇게 고통스럽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말의 과학적 근거를 입증하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고 한다.

미국 에모리대 그레고리 번스 교수팀이 사람들에게 전기충격 실험을 했더니 충격을 기다리는 사람의 뇌 속 통증감지 부분에서 실제 충격을 받을 때와 같은 반응이 일어나더라는 얘기다.

또 상당수가 기다리다 약하게 받느니 강해도 빨리 받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다 비슷하다" 싶은데 인터넷엔 "무슨 소리,나중에 맞으면 약하게 맞거나 안맞을 수도 있다"는 반응이 떴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숨죽이고 있노라면 흐지부지 되는 일도 많고 상황이 반전되는 수도 있으니.

그러나 언젠가 다가올 일이라면 빨리 겪는 것도 괜찮다.

아프지만 그만큼 서둘러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고 면역력도 생길 테니까.

세상은 자꾸 투명해지고 비밀이 발 붙일 자리는 줄어든다.

대책없이 기다리다간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할지 모른다.

기다리는 동안 속이 까맣게 타버릴지도 모르고.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