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지난달 타임지엔 흥미로운 기사가 한편 실렸다.

"What's the Next?"란 제하에 각계 전문가들의 예리한 통찰이 담겨있었는데,그 가운데 유독 가족 전문가의 예언이 눈길을 끌었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은밀한 내면세계를 공유하는 가운데 포만감을 충족시켜 주는 깊은 관계를 갈망한다.

그리하여 포기할 수 없는 기대감을 안고 결혼제도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뎌 보지만,결혼과 동시에 친밀성을 향한 기대와 깊은 관계를 향한 갈망은 멀리 도망쳐 버린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우울한 이야기다.

최근 출산율 1.08명이란 통계가 발표되면서 출산파업이 매우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음에 대한 우려가 깊어가고 있고,더불어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가 60세에 이르는 2015년이 되면 부양대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가고 있다.

바야흐로 가족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출산 및 부양이 뜨거운 사회문제로서 정치 무대의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현상을 곰곰 들여다보면 '가족시간(family time)'과 '산업시간(industrial time)'의 충돌이 매우 심각한 지점에 이르렀음이 감지된다.

지금까지는 가족시간의 희생과 양보를 전제로 산업시간의 요구가 우선순위를 점해왔으나,이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진 가족시간의 저항과 반격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가족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면,양육과 부양이 이뤄지는 생존공동체이자 관계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정서공동체로 요약할 수 있을 게다. 관건은 가족 공동체 안에서 양육과 부양이 원활히 이뤄지기 위해선 필히 누군가의 희생과 양보가 수반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데 이 희생과 양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별다른 의심 없이 여성의 몫으로 자연스럽게 할당되고 있음이 문제다.

가족시간은,규칙적으로 빠르게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산업시간과는 본질적으로 특성을 달리한다.

일례로 아이의 질병은 항상 예고 없이 닥치고 그들의 요구는 예측을 불허한다.

식탁 앞에 앉은 아이는 엄마의 출근시간을 배려해주는 법이 없고 잠자리에서 투정하는 아이 또한 엄마의 피곤함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들 '돌봄 노동'은 우리네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엔 틀림없으나,생산성 및 효율성을 최우선시하는 사회구조 하에선 사회적 보상과 개인적 보람을 보장받기 어려운 활동인 것 또한 사실이다.

오늘 우리의 눈에 가족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더미 속에 묻힌 작업장이 됐고,예전의 일터는 안락하고 쾌적하며 적당한 보상이 따르는 공간이 됐다.

상황이 이렇고보니 전업주부의 기회비용은 일찌감치 취업주부의 기회비용을 능가하게 됐고,맞벌이 부부가 규범화된 상황에서도 일과 가족의 조화가 여성에게만 과제로 부과되는 현실의 부당함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출산파업이 극심함에도 여전히 여성의 출산은 '생산력 저하'와 동일시되는 현실에서 출산과 취업을 '빅딜'하는 건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하루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철저히 조직에 몰입할 것을 요구하는 '일 중독 문화'가 고수되는 한,누군들 출산을 감행하겠는가? 현재 남녀를 불문하고 미혼자 100명 가운데 약 36명이 출산을 안 하겠다고 답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 '가족시간'의 저항과 반격에 응분의 답을 제공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가족 공동체 유지를 위해 이타적 희생이 요구된다면 그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의 몫이 돼야 할 것이며,우리네 삶의 질의 추락을 방지하려면 남녀 공히 '일 우선 이데올로기'를 폐기하고 일과 가족의 균형과 조화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의 획기적 전환 없이는 출산파업은 지속될 것이요,노후는 쓸쓸하기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