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C도 백기사로 시작했다"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 인수를 놓고 갈등을 겪고 있는 가운데, 현 상황이 2년전 KCC와 경영권 분쟁을 겪었을 때와 여러모로 닮은 꼴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27일 현대상선의 주식 26.68%를 매입해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지분 인수 배경에 대해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상선을 외국인 투자자의 적대적 M&A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지분을 매입했다"고 밝히며 현대상선의 '백기사'를 자청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그룹이 '백기사'라고 하기에는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아 오히려 흑기사에 가깝다"며 지분 매입 배경에 대해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2년전 경영권을 놓고 현 회장과 치열하게 다투었던 KCC 정상영 명예회장도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로부터 현대그룹을 보호해주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기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과 현 회장이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경합을 벌인 '시숙의 난'은 2003년 8월 정몽헌 회장이 자살한 직후 시작됐다.

정 명예회장은 그해 8월 8-10일 현대엘리베이터의 외국인 지분율이 0%에서 11.48%로 급등하자 '범현대가' 계열사 9곳을 동원, 엘리베이터 지분 16.2%를 사들이고 같은 달 19일에는 현대상선 주식 2.98%를 매입했다.

당시 정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자 그는 "외국인 투자자로부터 현대그룹을 지키기 위해 지분을 매입했을 뿐, 그룹의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고 밝혀 외부에는 현 회장과 현대그룹을 지켜주는 든든한 후견인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계속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모았고 결국 현 회장과 마찰을 빚으면서 양측의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됐다.

정 명예회장은 급기야 그해 11월14일 현대그룹 인수를 전격 선언해 시숙부와 조카며느리의 경영권 분쟁은 5개월 이상 계속됐으며, 2004년 3월 현대엘리베이터 주총에서 현 회장이 완승을 거두면서 '시숙의 난'은 겨우 끝을 맺었다.

현대그룹측은 이런 이유로 이번에 현대중공업이 지분을 인수한 것도 KCC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강하게 품고 있다.

한편 사태가 발생한 시점도 현대그룹이 외국인 투자자의 지분 매수로 위협을 받았고 현대가 전체 분위기가 극도로 어수선했던 와중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KCC와 경영권 분쟁을 겪었을 때에는 고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런 자살로 현대그룹의 경영권 공백이 있었고 검찰 수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에도 현대가의 장자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검찰 구속을 앞두고 현대가 전체 분위기가 어수선한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지금 상황이 2년전과 대체로 비슷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2년 전의 '학습'을 통해 그룹이 경영권 방어를 위한 노하우를 축적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현대상선의 지분 인수가 철저한 계획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금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은 8.69%의 지분을 갖고 있는 현대건설을 우호지분으로 영입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으며, 5월말로 예정돼 있는 3천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통해서 지분을 늘릴 계획이다.

현대중공업과 KCC도 유상증자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유상증자의 경우 20%를 우리사주 조합에 우선 배정하게 돼 있어 이를 활용해 지분율을 늘린다는 방침이다.

(서울연합뉴스) 윤종석 기자 bana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