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ㆍ류승범의 호연, 꽉 짜인 얼개 돋보여


이제 느와르까지도. 영화 '사생결단'(감독 최호, 제작 MK픽처스)은 그런 희망을 갖게 하는 영화다.

한국 영화계에서 느와르는 그다지 편치 않은 장르였다.

작년만 해도 김지운 감독이 이병헌을 파트너로 스타일리시한 영화 '달콤한 인생'을 들고 나왔지만 그 화려한 스타일은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미학적 실험으로만 평가받았다.

'사생결단'은 스타일과 현장감이 펄떡펄떡 숨을 쉬고 있는 영화다.

'바이준' '후아유' 등 멜로 영화를 만들었던 최호 감독의 전력을 의심하게 할 만큼.
마약을 소재로 삼아 판매상 거두를 잡겠다는 일념만이 가득한 미친 형사 도진광 경장(황정민)과 부유한 삶의 수단으로 마약을 이용하고 경찰과도 결탁하는 마약 중간판매상 이상도(류승범)가 주인공. 이 영화의 목표는 분명히 살아 있으며, 무엇을 향해 가는지 지향점 또한 분명하다.

최 감독은 수차례 "(느와르라는) 장르 영화라 해서 현실을 뭉뚱그려 그리지는 않겠다는 각오였다"고 말하며 "IMF 이후 격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의 모순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목격했고, 이를 담아내겠다고 작정했다"고 털어놓았다.

◇길에서 보낸 시간만큼 탄탄해진 시나리오
최호 감독은 2003년부터 2년여 동안 부산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직접 취재했다.

IMF 이후 마약 중독자들이 늘어났던 건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 국민의 단면을 보여준다.

수십 번 골목을 돌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최 감독은 영화의 기본 방향을 정했을 터.
최 감독은 "1970년대 야쿠자 영화 '의리 없는 전쟁' 시리즈를 만들었던 후카사쿠 긴지 감독에 대한 오마주"라고 표현했다.

그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배틀 로얄'의 긴지 감독에게 오마주를 바쳤던 '킬 빌'의 쿠엔틴 티란티노 감독과 다르다.

그는 "'의리 없는 전쟁'은 2차대전 직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모순을 끊는 일본 사회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평했다.

IMF 이후 한국 사회와 닮았다는 것.
마약을 정면으로 내세운 영화. 그러나 마약은 단순한 소재일 뿐이다.

생존을 향한 본능에 질척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이 생생히 그려진다.

거대한 먹이사슬이 존재하는 정글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정'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남겨놓는다.

◇마약을 둘러싸고 쫓고 쫓기는 인간들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야 할 만큼 마약이 만연해 있는 부산. 마약 판매상 이상도는 자신은 마약을 하지 않는 프로다.

어린 시절 마약 제조자였던 삼촌의 심부름으로 마약 배달을 했던 그는 삼촌의 농간으로 어머니까지 잃은 후 먹고 살기 위해 본격적으로 마약 판매에 나섰다.

도진광 경장. 마약 판매상의 거점인 장철을 잡으려다 선배가 죽고, 선배 형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상도를 이용해 전과를 올린다.

자신 때문에 교도소에 갔다온 상도를 다시 이용하려는 도 경장.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게 장철 때문임을 깨치고 그를 잡아야만 자신이 비로소 잠을 잘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친 듯이 장철을 쫓는 도 경장과 도 경장의 페이스에 점점 더 말려들어가는 상도. 얕은 수를 쓰려 하지만 상도는 도 경장 손바닥에 놓여 있다.

장철을 잡으려는 순간 손안에 쥔 물처럼 그는 스르륵 새나간다.

도 경장이 고작 피라미 같은 상도를 통해 전과를 올렸듯이 더 큰 세력은 더 큰 세력과 손잡기 때문이다.

자신이 걸어온 길과 같은 길을 가는 조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삼촌, 애인을 잃은 후 마약 중독자가 된 지영, 상도 똘마니 성근, 왜소하지만 잔인한 장철. 등장인물들은 모두 과거와 현재에서 얽히고 설킨 관계를 형성한다.

파국을 향해 점점 더 달려가며 영화의 긴장감은 끊어질 듯 팽팽하다.

도 경장과 상도의 운명공동체가 파괴되는 마지막 순간은 황정민이 "이를 말하려고 4개월을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할 만큼 영화를 한꺼번에 드러낸다.

◇영화를 끌고가는 배우의 힘
이제 황정민은 물을 만났다.

거침없이 자신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비릿한 살내음을 풍기면서 구식 선글라스를 낀 채 야비하게 웃는 도진광 경장은 황정민의 몸을 빌려 척박한 삶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야수가 된다.

류승범 또한 자신도 모르는 채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는 불쌍한 인생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황정민과 시너지 효과를 거두지만, 황정민이라는 거대한 봉우리로 인해 상대적으로 약점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 비교일 뿐.
조연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중견배우 김희라는 8년 만의 복귀작을 통해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무심한 듯 허무함과 쓸쓸함이 담겨 있는 그의 눈빛에서 삶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전라 연기도 불사한 추자현의 용기도 칭찬할 만하다.

두 배우에 가릴 수밖에 없지만 마약에 빠져 혼미한 정신을 연기하며 그는 자신의 비중을 스스로 키워나갔다.

부산 사람들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까닭에 언어가 얼마만큼 잘 표현되는지 궁금할 것. 아무리 사투리에 신경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해도 어쩔 수 없는 관심이다.

마산이 고향인 황정민은 말 그대로 본토 발음이다.

억양의 어색함이 남아 있는 류승범은 "부산 분들이 뭐라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서울 사람이거든요.

서울 말 한번 써보세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27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김가희 기자 kah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