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우절에 꾸는 꿈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김정산 < 소설가 >
돌아보면 사회가 요즘처럼 발전,진보한 시절이 또 있었을까 싶다.
인간은 확실히 선과 악을 모두 스승으로 삼을 줄 아는 훌륭한 지적능력을 갖추고 있다.
한창 입법화를 추진 중인 '정치인 성폭행 특별법'은 유난히 정치인들에게 가혹하다는 일부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달부터 발효,시행될 전망이다.
정치인이나 그에 준하는 공인이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을 경우 최고 10년 이상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니 한번 실수 치고는 가혹하다는 불만도 나올 법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그릇된 관념과 오래 묵은 환부를 도려내려는 일벌백계,읍참마속의 차원에서 추진 중인 법안이므로 당장 시행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지나가는 여성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성과 관련된 끔찍한 사례는 대부분 한두 가지씩 갖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이 집과 학교,직장과 사회에서 슬쩍슬쩍 경험한 수많은 추행(醜行)의 슬프고 불편한 기억들,남자들에겐 턱없이 관대하고 여자들에겐 지나치게 엄격한 '성 윤리(性倫理)'의 잣대가 이 법안의 시행을 통해 점차 개선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기자 및 언론인의 윤리강령도 강화된다.
기자가 취재원과 정당하고 공식적인 접촉 외에 얻은 정보는 어떤 경우에도 기사로 쓸 수 없고,밤늦게 접대자리나 노래방까지 따라갔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해당 기관에서 즉각 해고된다.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알려야 하는 기자와 언론인의 막중한 책무 및 자질을 감안할 때 뒤늦었지만 타당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공인의 거짓말에 대한 처벌과 응징 또한 일반인들에게 적용되는 강도를 훨씬 넘어선다.
공직자의 거짓말은 악의와 선의로 나뉘는데,우리는 지금까지 선의로 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대체로 관대한 편이었다.
예컨대 물러난 총리의 골프 관련 거짓말은 악의적인 것이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도,'북한특수가 곧 온다'거나 '시스템으로 운용되는 사회를 만들겠다''부동산값 잡고 양극화 해소하겠다''각종 규제 철폐해서 경제성장률 높이겠다'는 따위의 정치지도자 발언이나 공약에 대해선 결과가 그렇지 않아도 어물쩍 넘어갔던 게 통례다.
비록 거짓발언과 헛공약이 됐더라도 당사자는 그런 의지를 갖고 열심히 일했다고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달부터는 이런 거짓말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지난 2월 출범한 '매니페스토 선거운동 추진본부'는 정당의 정책을 샅샅이 조사하고 분석해서 정치인의 공약을 수치로 환산하고,이를 통해 '정책대결'과 '책임지는 선거문화 정착'을 추구한다.
따라서 유권자를 현혹시키려는 선심공약,애당초 실천 불가능한 헛공약을 남발하는 정치인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매니페스토 운동이 본격화되면 선거에서 당선된 정치인이 임기 중에 공약을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사후 처벌도 가능해진다.
국민을 기만한 행위가 임기 후에까지 재평가돼 그 괴리의 정도가 심하면 구속하거나 천문학적인 벌금을 물릴 수도 있다.
또한 쓸모 없는 국제공항 건설 따위로 막대한 혈세를 낭비했을 때는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공무원 집단을 끝까지 적발해 신분을 공개하고 가산을 몰수하는 '사후 정책 평가제'도 연내에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사회와 정치는 무섭게 발전,진보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런 세상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됐던가를 회상하면 너무 감개무량해서 목이 다 메는 요즘이다.
아,그런데 나는 내년 만우절에도 이따위 가망 없는 헛꿈이나 꾸고 있을까…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