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IMF환란 직전의 일이었다.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KT&G 사장에 외국인을 모셔오겠다며 외국 유력 신문에 사장모집 광고까지 냈다. 그러나 이력서를 받아보니 중동에서 담배 도매상을 하는 정도의 인물들 밖에 없었고….드디어 사장이 아니라 아예 소유자가 외국인이 될 모양이다. 혹 알 수 없지 않은가. 칼 아이칸이 10년 전 사장응모에서 떨어진 중동의 바로 그 담배 장사꾼을 대리해 나타났는지도. 논란은 크지만 KT&G의 경영권 향배는 사실 별 관심거리는 아니다.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겠습니까"라며 자기 모멸적인 질문을 해야 하는 규제 산업일 뿐이다. 세금을 걷으면 그만이고 전매 체제도 깨진 지 오래다. 그러나 독점 기업인 포스코나 한전이라면 어떻게 될까. KT와 철도공사 같은 곳도 KT&G의 사례를 좇아 외국인에게 소유와 경영을 넘겨야 하는 상황이 오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재경부 계획으로는 농협도 지주회사로 만든다니 장차 증시에 상장해 이 역시 외국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증권법이나 공정거래법 등 한국의 자본주의 인프라법에서 상장은 곧, '지배권의 공유'가 된지 오래다. 또 누구든 시장서 주식을 사들이면 국적 불문하고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다. 실은 국적 불문이라는 알량한 수사도 가식적인 것이다. 그 인수자가 뒤탈 없는 외국인이라면 더욱 좋다. 외국 자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뒤탈도 있을 것이 없다. (금융산업을 보라!) 그렇게 한국은 죽인지 밥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나라가 되었다. 미국 의회가 중국 기업의 자국 에너지 회사 인수를 제한하거나 항만 운영을 아랍에미리트 회사가 맡는 것을 놓고 논란을 떠는 것 자체가 실로 졸렬하지 않은가 말이다. 바로 이런 상황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지배구조도 뜯어고쳐 왔던 터다. 시민운동가들 또한 좌파라는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한국 자본주의의 소유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일해왔다. 개별 금융법은 물론이고 증권법, 공정법, 심지어 '금융산업의 구조개선법'까지 대주주 의결권을 규제하고 처벌하는 조항들로 이미 지뢰밭이다. 기업지배구조 개선론은 한국 자본주의 심장부를 파고든 좌파들의 트로이 목마다. 재벌을 규제하면 정의는 강물처럼 넘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사적 소유를 공동 소유로 전환시키겠다는 것이 좌파들의 궁극적인 목표다. 외국 펀드를 일컬어 "지배구조를 개선해주는 천사"라고 말한 여당 의원님의 말씀도 그래서 나온거다. 물론 호응세력이 없을 수 없다. 우파기회주의는 굳건한 동맹군이다. 월가에도 없는 의결권 승수니 뭐니하는 신종 상품을 들여와 이미 법제화까지 끝냈다. 그러나 어떤 명분이건 결국은 민간 국적자본에 대한 차별적 무장해제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만일 삼성과 현대차가 본사를 외국으로 옮기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국내자본에 대한 차별도 푸는 것이 마땅하다. 증권시장은 언제나 기업가치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소유자 경영은 열등하며 대주주와 소액주주는 완전 등권이라는 급진론이 이들이 내세우는 이상국가론의 얼개다. 그러나 그런 완벽한 증권 이상국가는 미국에도 교과서에도 있어본 적이 없다. 파스칼이 노름 판돈의 배분 문제를 놓고 수학적 고민을 했던 이래 투기적 행위에 대해 이처럼 완벽한 비이성적 신뢰를 보낸 적도 역사에 없다. 금융산업을 통째로 외국에 들어바친 나라도 헝가리를 제외하고는 한국이 유일하다. 종속 이론의 멕시코도 우리보다는 외국자본의 금융 지배력이 낮다. 더는 넘겨줄 금융회사가 없으니 이제는 기간 산업이라도 넘기자는 말인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