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윤하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bluerock@scourt.go.kr > 감성이라는 말은 이성이라는 말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감성은 인간의 오감을 포함한 여섯 감각기관에 의하여 생겨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즉 눈,코,귀,혀,몸,의식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형성되는 색,향,소리,맛,촉감,뜻이라는 형상을 대체로 감성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감성에 대한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감성주의라고 말한다. 사물의 이치를 생각하고 깨달아 알아내는 것을 추구하는 이성주의와 다르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감성주의가 사회전반에 걸쳐서 널리 퍼져 있다. 기업광고나 판매 전략에서는 일반적이다. 공익성을 지향하는 방송 매체,신문기사도 감성에 호소하는 일이 많아졌다. 개인의 삶의 의미,교육의 목적,행복의 지수가 감성지수로 직결되어 표현된다. 정치인의 이미지 표현도 감성을 자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이 훨씬 효과가 빠르고 넓게 번져나가기 때문이다. 감성적 삶의 긍정적인 면은 개인의 권리를 신장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인의 삶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행복의 추구라고 한다면,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진리의 삶에서 얻어지는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 마음'이어서 감성적인 삶과는 먼 거리가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의 감성주의를 염려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은 감성이 주는 즐거움만을 얻으려고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감성이 주는 즐거움은 영원할 수 없는데도, 이를 가지려고 집착하니 그 자리에 고통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즐거움과 고통이 모두 한 자리에 있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감성도 이성도 그 자체가 인간이 가지는 참된 모습이 아니다. 분노와 슬픔을 거부하고 기쁨과 즐거움에 집착하여도 사람은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지 못하면 삶의 행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허상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아니한 채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수행을 끊임없이 하여 조금이라도 그곳에 가까이 간다면, 행복이 앞마당 잣나무에 있음을 느낄 것이다. 감성은 마음의 본체를 볼 수 없어 수시로 변화하고,일어나는 만상에 집착하니 번뇌가 쉴 수 없음이다. 몸이 느끼는 감성의 즐거움에 집착하는 자리가 원래는 진리의 자리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이 원래 한 뿌리이고 자연과 사람이 한 몸임을 알아야 한다. 이를 깨달으면 남을 도우는 일이 행복임을 알고,감성의 즐거움만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멀리할 것이다. 번뇌 있는 그 자리에 지혜의 빛 비치면,그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