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된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깨고 싶었습니다."


15일 차관인사와 함께 25년3개월간 통일부에서 한 우물을 판 이봉조 차관이 공직생활을 일단 마무리하게 됐다.


이 차관이 통일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학원생 시절인 1980년.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별정직 채용시험을 통해 통일부에 발을 들여놓은 뒤 결국 청춘을 바쳤다.


이 차관이 통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도 민주화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분단 해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젊은 정치학도의 순수한 초심이었다.


그가 통일부에서 처음 맡은 일은 정치외교 분야의 조사업무.로동신문과 북한 방송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분석하며 보고서를 쓰는 게 일과였다.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정도로 북한 사회에 몰입했다는 그는 매년 특정 시기에 반복되는 북한 기사의 구성을 파악,다음 날 사설 제목을 정확히 맞힌 일화도 갖고 있다.


예리한 분석과 정확한 전망이 주특기인 그는 국민의정부 시절 청와대 통일비서관을,참여정부 들어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 정책조정실장을 맡아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브레인 역할을 담당했다.


좌우명인 '부단의 노력,부단의 반성'의 결과다.


남북 관계의 특성상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는 이 차관은 "이제 그 짐을 덜게 된 홀가분함보다는 남북 관계를 더 진전시켜 놓지 못한 아쉬움이 더 크다"며 소회를 밝혔다.


그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평양에 다녀오는 등 역사의 큰 흐름에 같이 있었기 때문에 고달픈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 차관은 "회담이 열려 북측과 씨름할 때보다는 회담이 중단돼 마음고생할 때가 더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 때문인지 그는 서해교전으로 중단된 장관급 회담을 2002년 8월 금강산 실무대표 접촉을 통해 되살리고 작년 5월 나흘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을 통해 1년 가까이 중단된 남북 당국 간 대화를 복원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 차관은 기억에 남는 북측 인사로 그와 가장 많이 만난 전·현직 장관급 회담 북측 단장인 김령성을 꼽았다.


그와는 미국 출장에서도 만나기도 했다.


그의 퇴임을 놓고 통일부 안팎에서는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1년7개월간의 차관직 재직 기간은 물론 그동안 통일부에 있으면서 직원들의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이 차관은 "통일부를 떠나지만 남북 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진전을 위한 일이라면 앞으로도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