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석규가 김윤서에 덧씌워진 건지, 김윤서가 배우 한석규를 만나 제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한 건지.


23일 개봉할 영화 '음란서생'(감독 김대우, 제작 영화사 비단길)에서 어느날 갑자기 음란소설가가 되는 조선시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사헌부 장령 김윤서는 한석규와 이처럼 궁합이 맞는 인물이다.


당파싸움이 극심하던 시절, 소심한 문사(文士) 김윤서는 우연한 기회에 음란소설을 읽게 되고, 우연한 기회에 왕의 여자 정빈(김민정 분)을 만나게 되면서 진정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누구나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나 현실이라는 굴레로 인해 자포자기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반면교사처럼 다가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석규는 "대사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젠체하는 현대인의 속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영화이자 자신만이 느끼는 행복했던 단 한순간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지적이면서 올바른 길로만 가는 것 같은 한석규의 이미지. 한편으로 나약해 보이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을 폭발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것이라 느껴지는 배우. 그런 한석규의 이미지로 인해 김윤서는 관객에게 실존했을 것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리듬감을 찾았다


수 년 간 영화계를 '자의반 타의반' 떠나 있었다.


영화 '이중간첩'으로 돌아왔으나 흥행 참패. 사람들은 한석규의 명성에 의심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후 '그 때 그 사람들' '주홍글씨' '미스터 주부 퀴즈왕', 그리고 '음란서생'까지. 4월께는 '구타유발자들' 개봉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몇 년 동안 연기를 못했던 것을 만회하려고 작정한 듯 작품을 잇달아 하고 있는 중이다.


"하고 싶어요. 그냥." 짧은 답변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하다.


"선수가 경기를 안 하면 리듬감이 떨어지잖아요. 다시 (연기)하게 되면서 없어진 리듬감에 크게 당혹스러워했어요. '그때 그 사람들'이 리듬감을 찾게 해준 좋은 작품이었죠. 그 후에는 늘 그랬다시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했어요. 좋은 무대를 자꾸 만나니까 경기를 자꾸 하고 싶어지는 거죠."


◇내게 올 줄 알았던 캐릭터


그는 이 영화를 촬영하며 "언젠가 내게 올 줄 알았던 캐릭터"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게 무슨 말일까.


"드라마 '서울의 달' 홍식이를 연기할 때 직감적으로 좋은 무대, 좋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죠. 하면서 더 느꼈구요. 내 생애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그런 역할이라고. 그런데 '음란서생'의 윤서를 만나는 순간 배우 인생에서 두번째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아, 다시 올 수 없을지 모를 캐릭터구나' 라고. 관객에게 추억처럼 윤서가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대우 감독에 대한 신뢰가 컸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김 감독의 작품 중 '반칙왕'을 가장 좋아한다.


'음란서생'의 원래 시나리오는 딱 100신이 등장한다.


"100신이 등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시나리오예요. 이 때문에 몇몇 장면이 잘려나가 편집된 완성본은 '선혈이 낭자한' 결과물인 거죠. 엑기스가 들어 있어요."


◇윤서를 통해 진짜 남자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는 다양한 이야기가 촘촘하게 엮여 있다.


사대부라는 허울에 갇혀 하고 싶은 것을 못했던 한 남자가 자신의 욕구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용기, 정적인 의금부 도사 이광헌(이범수)과의 우정, 황가(오달수)와의 신분을 뛰어넘는 친교, 그리고 정빈과의 사랑까지.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감독님과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어느 때였는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윤서에게는 정빈에게 날아든 벌을 쫓아내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을 거예요."


이야기가 계속된다.


"윤서의 사랑과 우정을 통해 소위 '남자'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과연 뭐가 남자인가, 남자다움이란 뭔가. 진짜배기를 보여주고 싶었죠."


◇배우로서의 인생, 골프에 비유하다


눈 딱 감고 물었다.


솔직히 예전과 같은 흥행은 되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가 생각하는 배우의 끝이 있어요. 뭐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거니까요. 대책없이 끝나지 않고, 잘 끝내고 싶다는."


그리고 골프에 비유해 긴 설명을 이어갔다.


"골프 선수로 치면 멋있게 정규 라운드 18홀을 끝내고 싶어요. 타이거 우즈가 대단한 건 3일 동안 기복이 있다가도 마지막 4일째 경기에서 너무나 잘 친다는 거죠. 연장전까지 가면 반드시 이기고. 그건 실력 차이가 아니라 부단한 자기 담금질, 어찌보 면 자학에 가깝죠."


그가 자신에게 대입해 말하는 내용은 이렇다.


'전반부는 너무나 경기를 잘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리듬을 잃었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 리듬을 찾았다.


리듬을 찾았다고 전부가 아니다.


골프에 '운'이란 게 따라야 하듯, 내 힘으로 안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무언가도 반드시 실력이 있어야 곁에 오는 것이다.


"지금 전 한 샷 한 샷 집중해서 치고 있어요. 골프를 즐기면서 치는 게 가장 높은 수준이지만, 아직 그 경지에 전 도달하지 않았어요. 다만 작품을 통해, 내 몸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게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거죠."


이제 어느 선은 넘어서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석규의 고민과 노력이 치열할수록, 우리가 만나는 배우 한석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김가희 기자 kah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