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새해 첫날,미국과 프랑스의 공중파를 통해 방영된 한 특집 프로그램이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다름아닌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백남준의 작품이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을 풍자한 이 작품은 비록 TV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결코 '빅브라더'가 될 수 없음을 풍자했다. TV의 역기능을 예술적으로 해석하면서 아울러 비디오 예술의 원조로 자리매김한 출세작으로 꼽힌다. 백남준이 주목을 받게 되리라는 조짐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당대 최고의 전위 예술가들인 존 케이지라든지 '흐름'이라는 뜻의'플럭서스(Fluxus)'그룹을 창시한 요셉 보이즈는 그를 무던히도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백남준이 스승이라 부른 존 케이지는 "당장 죽게 된다면 백남준의 재담을 못 듣는 것이 가장 아쉽다"고 말할 정도로 절친했다. 그가 관념적 예술형식을 버리고 무엇이든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과감히 시도한 것도 이 거장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섹스를 음악으로 표현한다든지,무대 위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 부순다든지,관객의 넥타이를 자른다든지,객석을 향해 소변을 본다든지 하는 등의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이런 백남준을 두고 세계 예술계는 '가장 과격하고 폭력적인 예술가''동양의 문화 테러리스트''지구촌 민주주의의 건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말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예술은 원래 사기치는 거다" "예술가는 절반은 재능이고 절반은 재수다" "자본가들이 제 발로 걸어와 내 작품을 사게 만들어야겠다"고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55세가 되던 해,차차 죽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말했던 백남준이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평소 입버릇처럼 "창의력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반드시 성공한다"는 신념을 피력하곤 했다. 전통을 거부하면서 재미와 즉흥성으로 독자적인 예술영역을 구축한 그의 체취를 앞으로 용인에 건립되는 '백남준 미술관'에서 두고두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