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지난 주말 학생들과 화합을 위한 수련회(MT)를 다녀왔다. 함께 간 곳은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수안보의 고사리 수련관.대학원생과 학부생들이 모처럼 함께하는 자리였기에 서먹함을 달래고자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우린 '걸물(傑物)' 한 녀석을 만났다. 05학번 1학년생.정보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이력부터 심상치 않았는데,지금 현재는 직원 20여명을 거느린 벤처기업 사장이라 했다. 노트북을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이유는 옆구리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함도 있지만,자판 두드리는 속도가 필기 속도를 월등히 능가하기 때문이란다. 최근에는 웰빙 열풍을 타고 믿을 수 있는 우리 농산물 유통 분야 쪽으로 사업 확장을 시도중이라 했다. 사업에 힘쓰느라 학사경고를 받긴 했지만, 현재 자신의 삶이 지극히 만족스럽다고 했다. 확실히 여성들의 선전이 눈부신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작년도 사법고시ㆍ행정고시ㆍ외무고시 여성 합격자 비율이 각각 24.4%, 28.4%, 45.7%에 이르렀는데 올해는 이 기록을 모두 능가하리라는 전망이요,그동안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주요 일간지 여성 기자 진입률도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는 소식이다. 이미 공무원 조직은 여성 (목표)할당제의 효과가 가시화되기 시작했고,국내 유수 대기업의 여성 대리 및 과장 비율이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오는 임계점',곧 티핑 포인트를 지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물론 사회 전 영역에서 여전히 최고위직(top level) 여성들을 찾아보긴 어렵지만,그 이유는 그동안 '파이프라인'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기에 지금 추세로만 약진한다면 여성의 최고위직 대거 진입은 시간문제라는 낙관론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 한데 이 대목에 이르면 은근히 신경이 곤두선다. 우리보다 25년이나 앞서 여풍당당을 경험했던 미국의 경험에 비춰볼 때,과도한 비관도 경계해야겠지만 섣부른 낙관 또한 불허해야겠기에 말이다. 실제로 1999년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보고는 우울했다. 포천 선정 5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 가운데 남녀가 동수를 이루려면 앞으로 270년이 걸릴 것이요,상ㆍ하원의 남녀 의원 비율이 동등해지기까지는 500년이 더 지나야 하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명문 법대 졸업생의 30% 이상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로펌의 파트너로 남는 비율은 여성이 남성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명문 경영대 출신 남성은 가족과 경력의 양립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으나 여성은 독신으로 남거나 출산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경력을 희생해야 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세계 유수 대학의 남녀 교수 비율이 최근 20여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에 이르면,이것이 설령 미국 이야기라 해도 가슴이 답답해온다. 우리네라고 별 수 있겠는가. "인턴은 출산 이전의 여성을 원하고 레지던트는 출산을 끝낸 여성을 원합니다." "여성 변호사가 출산휴가를 가면 고객들이 다 떨어져나가 조직에 미치는 손해가 막심합니다." "미혼여성의 생산성은 남성과 큰 차이가 없지만 기혼여성의 생산성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특히 여성 과장이 출산휴가에 들어갈 경우 부하 직원관리에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생깁니다." 최근 여성의 사회진출이 본격화된 이후 현장에서 들려오는 생생한 목소리들이다. 여성인력에 관한 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일도 중요하지만 진입 이후 곳곳에 산재한 유리벽을 제거해주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출산과 생산성을 배타적 관계로 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가족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일 중심 이데올로기'도 극복의 대상이 돼야 할 것이다. 현재 보무도 당당하게 진입한 여성들의 10년 후, 스무 살 벤처기업 여사장의 20년 후가 못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