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원 < 메트로뱅크 부지점장 marianneseok@yahoo.com > 1994년 봄,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리는 국제 어린이 도서전에 간 적이 있다. 열심히 책을 둘러보다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시간이 좀 걸려서 화장실을 찾았는데 다행히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한 사람이 나오기에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나와서 보니 입구에서 몇몇 사람이 언짢은 눈초리로 나를 보는 것이 아닌가. 들어갈 때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화장실 안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대신 바깥에 한 줄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너무 민망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부터 밖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살펴 보니 참 합리적인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안에서 여러 줄을 서면 어느 줄을 택했느냐에 따라 먼저 온 사람이 더 늦게 화장실을 이용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바깥에 한 줄로 서서 기다리면 도착한 순서대로 이용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일을 할 때는 줄을 잘 서야 돼.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줄을 잘 골라야 일을 빨리 볼 수 있지'와 같은 농담은 더 이상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다음 해 동생을 만나기 위해 도쿄에 갔다. 지하철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아무 생각 없이 나란히 섰다. 동생은 나에게 자기 뒤로 자리를 옮기라고 하면서 도쿄 지하철역에서는 걸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에스컬레이터의 한 줄은 비워둔다고 말했다. 바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난 후 한 백화점 화장실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화장실 바깥에 한 줄로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우리의 줄서기 방법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또 언제부터인가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이용 안내문에 '서서 가는 사람은 오른쪽으로,걸어가는 사람은 왼쪽으로'라는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모르고 지키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이 바뀐 줄서기 방법을 따르고 있다. 아마도 외국에 가서 보고 우리 방식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중 누군가가 방법을 바꾸어 보자는 제안을 했고,다른 사람들도 좋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입으로만 개혁을 외치며 좌충우돌하는 이가 아니라 작은 일 하나라도 합리적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쪽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나의 물방울이 모여 큰 내를 이룬다고 한다. 우리나라 구석구석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하나하나가 보다 나은 방향으로 고쳐지다 보면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