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구 < 논설위원 > 요즘 노동계 형편이 참으로 딱하다. 노동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날로 차가워지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한데 취업장사 등 온갖 비리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예전과는 달리 원칙을 강조하고 나서는 정부도 상대하기에 호락호락하지 않다. 노동부장관 퇴진을 요구하며 국제노동기구(ILO) 아ㆍ태지역 부산총회를 무산시킨 사건은 비난여론만 비등하게 해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는 부메랑이 됐다. 이쯤되면 노동계 지도부의 입장도 대단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상황이 어렵다 해서 완전히 일손을 놓을 수도 없고 사면초가의 처지를 이겨나가기도 결코 쉽지 않은 까닭이다. 왜 이 지경에까지 내몰렸는지,스스로 자초한 것은 아닌지 정말 냉정히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다. 노동문제를 전공하는 원로교수들이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정치투쟁과 조직이기주의를 버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 노동운동을 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와 관련해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우리나라의 노조조직화율은 10%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에 불과해 근로자 열 명 중 아홉은 조합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합원들은 대부분 인정받는 대기업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근로자들이어서 정말 어려운 여건에서 박봉에 시달리는 중소기업 근로자나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형편과는 큰 차이가 있다. 노동계가 툭하면 총파업에 나서면서 마치 모든 근로자를 위한 일인양 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둘째,무리한 노동운동은 수많은 다른 근로자들의 피해를 유발하게 된다는 점이다. 대기업 근로자들이 과도하게 임금을 올리면 회사측으로선 원가절감을 위해 납품 가격 인하 등을 추진하게 마련이고,그리되면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실제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임금 격차는 날로 확대되고 있고 비정규직 근로자 역시 급증추세에 있다. 대기업 근로자들이 파업을 할 때마다 배부른 파업이라든가 집단이기주의라는 비난 여론이 나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셋째,노조는 더이상 약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근로자 한사람 한사람의 힘이야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노조라는 이름으로 뭉쳐진 근로자들의 파워는 결코 회사에 뒤진다고 보기 어렵고 사용자 쪽에서 눈치를 살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노조는 또 다른 권력으로 자리매김했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권력에는 책임도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노동계가 과연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는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이런 점들만 생각해 보더라도 강경일변도 노동운동은 더이상 곤란하다. 노조가 근로조건 향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근로자와 국민들의 피해를 강요하는 것이 돼선 안된다는 이야기다. 아시아나 조종사노조가 정부의 긴급조정권까지 동원되는 총력 투쟁을 벌였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 없었고 현대ㆍ기아차의 연례행사 파업에 신물을 내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 은인자중하던 교수들까지 나서게 된 작금의 상황이 노동계 스스로 노동운동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