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방송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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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방송된 KBS TV '내 사랑 누굴까'의 한 장면.매사에 똑부러지는 손주며느리(이승연)가 쓰던 프라이팬을 찾는 시할머니(여운계)에게 "낡아서 버렸다"고 말했다 혼쭐이 난다.
할머니는 "늙은이 앞에서 낡아서 버렸다니.네 눈엔 낡은 건 죄다 내다버려야 할 걸로 보이니" 하고 야단친다.
작가 김수현씨는 드라마를 통해 이렇게 젊은층의 버릇없음과 노인 내지 오래된 것에 대한 경시 풍조를 꼬집었다.
그런가 하면 휠체어를 탄 주인공이 노래방도 못가고(주로 지하나 2층에 있다) 즉석사진도 찍을 수 없는(서있어야 한다)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장애우 편의시설의 확충을 촉구한 드라마도 있었다.
(2000년 SBS '팝콘')
공중파방송의 역할엔 이처럼 잘못된 세태를 바로잡고 함께 지켜가야 할 윤리적 기준을 세우는 일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공중파TV 드라마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 뺨을 때리고(KBS 2), 쇼프로그램 화면에 출연자의 알몸이 노출되는(MBC) 일이 발생했다.
드라마는 도덕교과서가 아니고 방송이 세상사의 단면을 전하는 것도 사실이다.
며느리에게 싫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김치를 담아주되 집안까지 들고 가면 안되고 경비실에 맡겨놔야 한다는 서글픈 우스갯소리가 나도는 마당이다.
그렇지만 며느리가 시어머니 뺨을 친다는 설정은 터무니 없음을 넘어 어지럽고 무섭다.
선정성도 마찬가지다.
케이블TV에선 밤 12시도 되기 전에 낯 뜨거운 장면들이 쏟아지고, 공중파TV에서도 처음 만난 남녀가 호텔로 직행하고 미혼여성이 당당하게 "오래 굶었다"(MBC '내이름은 김삼순')고 하는 판에 키스 장면도 안 된다는 식의 잣대를 들이댈 순 없다.
아무리 그래도 한쪽에선 알몸 장면을 내보내고 다른 쪽에선 뉴스의 이름으로 이를 반복 방송하는(모자이크 처리 했다지만) 건 시청률을 앞세운 방송 테러에 다름 아니다.
무한경쟁 탓인지 모르지만 무슨 일이든 초조해 하면 결과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차제에 분명하고도 단호한 조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