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민 칼럼] 우리 경제는 어디로 수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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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민 < 본사 주필 >
'신바람 나는 경제를 위한 정부의 약속.' 올해 하반기 경제운용방향을 홍보하는 재정경제부 출판물 표지의 제목이다.
엊그제 우편으로 도착해 그냥 책상 위에 있다.
그런데 함께 놓여진 최근 신문들의 제목과 어울리면서 묘한 감정의 파장을 만들어낸다.
'대통령 빼고 다 도청했다' '안기부 X파일 공개' '삼성협박 실패하자 방송에 흘려''도청테이프 274개 압수'….
국가정보기관이 정계 재계 언론계 인사들의 대화를 불법도청했고, 그 테이프가 유출돼 협박용으로 쓰였다는 소위 'X파일' 사건 기사의 제목들이다.
불법도청 테이프가 무더기로 압수돼 핵폭풍으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내용도 이어진다.
나라 꼴이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테이프가 불법적으로 빼돌려져 불법적인 목적으로 이용된 사건에 온 나라가 들썩이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과거에 갇혀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정부가 신바람 나는 경제를 약속한다? 무엇으로,어떻게 그렇게 하겠다는 건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예산을 좀 더 많이 푼다고 경제가 절로 신바람이 날까. 금융지원을 더하고 세금을 깎아주면 기업과 국민들이 감동해 더 열심히 일하게 될까. 그렇진 않다.
해법은 너무도 간단하다. 생산주체인 기업들이 신나게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춰주면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상황인가.계열기업이 좀 많다고 대기업 투자를 제한하는가 하면 지배구조가 잘못됐으니 고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엊그제 열린 한 세미나에서 경제부총리는 기업들이 돈을 잔뜩 쌓아놓고도 투자는 하지 않으면서 규제 탓만 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돈을 벌 궁리는 하지 않으면서 정부 욕만 하는 데모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식으로 어떻게 경제를 신바람 나게 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학자들이 각국의 경제발전 패턴변화를 분석한 수렴이론(收斂理論)은 성장전략을 어떻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후발국이 선진국들의 발전경로를 따라가기도 하고,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특히 어지간히 발전하는 국가라 하더라도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좁히지 못하면 결국 선진국 반열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비(非)수렴 함정'(non-convergence trap)이다.
그런데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은 이미 약화되기 시작했고,'정체'는 고사하고 오히려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앞선다.
더구나 요즘 경제인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도청테이프에 삼성그룹의 대선자금 지원내용이 들어 있다지만,도청 자체가 불법인데다 그 내용의 진실여부도 확정되지 않은 것을 놓고 벌써 기업부터 매도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일임에 틀림없다.
물론 도청파문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는 만큼 모든 것을 덮기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법은 지켜져야 한다.
불법으로 도청하고 불법으로 유출된 테이프의 확인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수사를 벌이면서 법적 심판을 구한다는 것이 도무지 법정신과 합치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미국과 일본 등의 선진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중국은 약진하고 있는데 우리만 유독 '나홀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느닷없는 연정(聯政) 제안은 또다시 정치권을 혼란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것도 주가지수가 1000을 넘는 등 경제가 잘되고 있으니 이제는 정치개혁도 좀 거론해야겠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지금은 선거를 겨냥한 '정치 산술(算術)'보다는 선진국 진입을 위한 '경제 산술'이 더 절실한 때다. 신바람까지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최소한 실망과 좌절은 안겨주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