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치료는 혼자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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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아산생명과학연구원장
어떤 보호자는 앞에 나서고, 어떤 보호자는 조용히 뒤에 머문다. 보호자가 지나치게 앞서 나서면 나는 의도적으로 환자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특히 치료 방향에 대한 선호를 묻거나 항암제 변경을 논의할 때는 더 그렇다. 답변이 조금 정리되지 않더라도, 환자가 직접 말할 수 있도록 기다린다. 치료의 결정은 결국 환자 몫이기 때문이다.
반면 보호자가 말 없이 옆에 서 있기만 할 경우 나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옆에서 보시기에 환자분이 어떠신 것 같나요?” 그러면 “같이 살지 않아서요”라고 답하는 보호자도 있고, 말 대신 고개만 끄덕이는 보호자도 있다. 환자와 보호자가 얼마나 일상을 함께하고 있는지는 그렇게 조용히 드러난다.
나는 차트 한구석에 보호자가 누구였는지 간단히 메모해 둔다. 중요한 순간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알기 위해서다. 단순한 의사 결정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은 함께 오시던 분이 안 보이네요”라고 건네면, 예상보다 따뜻한 반응이 돌아온다. 관심을 받았다고 고마워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선명히 기억에 남는 보호자들이 있다. 딸과 함께 오는 60대 여성 환자가 있다. 항암 치료가 벌써 3년째라 지칠 법도 한데 두 사람은 유난히 수다가 많다. 대기실에서부터 이어진 활기찬 대화는 진료실까지 흐른다. 이상하게도 이런 환자는 기다려진다. 친구와 함께 오는 환자도 있다. 지방에서 오는 환자인데, SRT역에서 만나 함께 병원에 온다고 했다. 친구가 보호자로 오는 경우가 드물어서 “두 분은 어떻게 친해지셨어요?”라고 물은 적도 있다. 가족은 아니지만, 치료 여정 속에서는 분명히 소중한 동반자다.
보호자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자를 넘어 환자가 치료를 견디도록 옆에서 버텨주는 지지자다. 그래서 요즘은 보호자라는 말 대신 ‘케어기버(caregiver)’라는 표현을 쓴다. 치료 여정에 함께 참여하고 함께 이겨내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케어기버의 감정적 지지가 치료 과정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연구는 많다. 아직 생존율을 직접적으로 향상시킨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내 임상 감각에 의하면 환자 곁에 좋은 케어기버가 있으면 치료가 조금 더 오래 이어지는 것 같다. 숫자로 말하자면 적어도 3개월쯤. 항암제가 평균 생존 기간을 3개월 연장하면 ‘의미 있는 신약’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체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치료는 약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누군가 곁에서 대신 묻고, 대신 버텨주는 시간이 쌓여 비로소 치료는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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