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금융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오이겐 뢰플러(Eugen Loeffler·44) 하나알리안츠투자신탁운용 사장이 이번 주말 한국을 떠난다. 온 나라가 외환위기의 고통에 신음하던 1999년 7월 독일 금융그룹 알리안츠가 제일생명(현 알리안츠새명)을 인수하면서 이 회사의 최고정보책임자(CIO)로 한국에 왔으니 꼭 6년 만이다. 지난 2001년 알리안츠와 하나은행이 하나알리안츠투자신탁운용을 함께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공동 대표이사를 맡아온 그는 8월부터 스위스 알리안츠인슈어런스그룹 이사회 멤버 겸 자산운용책임자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다. 뢰플러 사장은 2001년 5월부터 최근까지 한국경제신문 '다산칼럼' 필진으로 참여,칼럼니스트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인터넷으로 서비스된 영어 원문 칼럼은 경제·경영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에게 좋은 교재로 큰 인기를 모았다. 그는 40여편의 칼럼을 통해 줄곧 자유시장경제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외환위기 이후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가던 정부와 기업,그리고 시장 참여자들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졌다. 그의 칼럼은 최근 단행본('시장이 천재보다 현명하다'·한국경제신문사 펴냄)으로 묶여 출간됐다. 뢰플러 사장을 지난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국 경제는 지금 성숙기의 중간 단계에 와 있습니다 . 90년대 초기까지 보여줬던 높은 성장률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싼 비용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구 증가가 멈췄기 때문입니다." 뢰플러 사장은 침체에 빠진 한국 경제의 재도약 가능성을 묻는 첫 질문에서부터 거침없는 답변을 쏟아냈다. "하지만 낮은 성장률이 곧 장기 불황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은 앞으로 10년간 3∼5%의 성장을 이룰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코 낮은 게 아닌 만큼 한국 정부와 국민들도 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뢰플러 사장은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와 기업,국민들이 낮은 경제성장률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인위적으로 성장률을 높이려는 정책은 적지 않은 비용을 부릅니다. 6%가 넘는 성장을 만들어낸 지난 2002년 전후의 신용카드 거품은 좋은 예입니다. 많은 선진국처럼 저성장에 적응하면서 밝은 미래를 가꿔 가려면 효율성과 규율을 확보해야 합니다. 높은 경제 성장 시기에는 실책이 종종 고(高)성장에 의해 만회되기 때문에 관대하게 용서받지만 저성장 단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정부는 기업 투자를 늘리는 데 열을 올리기보다 효율적인 투자가 이뤄지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아시아나항공 조종사와 병원노조 파업 등 노사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노동시장 유연성은 경제성장의 키(key)가 되는 요소입니다. 유럽은 유연성 없는 노동시장이 개혁을 늦췄고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뢰플러 사장은 그러나 노사대립을 풀려고 기업의 정리해고를 규제하는 방식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많은 나라가 정리해고를 법적으로 규제함으로써 노동시장을 보호하려 하지만 이는 더 높은 비용을 불러올 뿐입니다. 노동비용이 비싸질수록 수요는 줄게 돼 결국 노동자만 손해를 봅니다. 실업자를 위한 합리적인 사회보장제를 마련하고 직업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유럽의 예에서 보듯 과도한 사회보장제도는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만큼 조절이 필요합니다." 그는 특히 고국인 독일의 경우 노동자를 보호하는 각종 법률로 인해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최근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삼성 견제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한국은 삼성이라는 기업을 가졌다는 것에 행복해 해야 합니다. 다소 지나칠 수 있지만 지금의 삼성이 없다면 지금의 한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삼성은 반도체와 휴대폰,LCD(액정표시장치) 등에서 극도로 치열한 경쟁에 노출돼 있습니다. 시장 경쟁 외에 추가적인 행정 규제는 적절치 않습니다." 금융인으로서 뢰플러 사장이 보는 '동북아 금융 허브'의 가능성도 궁금했다. "한국 정부가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해 자산운용 시장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는 바람직해 보입니다. 그러나 KIC 설립만으로 세계적인 자산운용사의 아시아본부가 한국으로 옮겨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오히려 한국의 자산운용 시장이 급성장해 매력적으로 비쳐지면 자연스레 허브로 떠오를 것입니다. 또 시장이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에 의해 작동되며 정부의 불필요한 간섭이 없다는 믿음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뢰플러 사장은 이어 "한국의 규제가 글로벌 수준에 크게 뒤떨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때때로 정부가 규제와 통제에 중점을 두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경험한 것도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법안 심사의 목적은 금융회사에 타격을 주려는 게 아니라 효율적인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30일 출국하는 뢰플러 사장은 요즘 지인들에게 인사하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회사 업무를 매듭짓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6년은 비즈니스와 개인적인 면에서 모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꼭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한국 음식이 좋고 아름다운 강릉 해변과 전라도 지역의 섬들도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하나알리안츠투자신탁운용의 한 직원은 "뢰플러 사장은 거의 한국인"이라며 "청국장과 순대,홍어는 물론 보신탕까지도 즐겨 먹는다"고 귀띔했다. 그의 부인은 한국인으로 독일에 유학왔을 때 만났다. 2남1녀의 자녀들이 모두 한국어를 잘한다는 그는 "처갓집이 한국에 있는 만큼 회사 일이 아니더라도 자주 올 계획"이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진=양윤모ㆍ글=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 ------------------------------------------------------------------- 1961년생 199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경영학 박사 1990~1997년 독일 알리안츠 본사 재무팀 근무 1998년 독일 알리안츠자산운용 유럽지역 리서치 총책임자 1998~1999년 알리안츠자산운용 홍콩지사장 1999~2000년 한국 알리안츠생명 CIO 2001년~현재 하나알리안츠투신운용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