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17일 정동영(鄭東泳) 통일부장관과의 면담에서 보여준 모습은 지난 2000년 10월 미국의 장관급 인사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의 방북때와 판에 박은 듯 흡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면담 일정을 상대에 미리 알리지 않고 전격적으로 상대와 만나는 '깜짝 면담'이었다는 점을 비롯, 북한의 사소한 잘못을 먼저 실토해 상대방의 신뢰를 유도한뒤 북한의 미사일 또는 핵 정책이 외화벌이나 안보를 위해 필요 불가결한 조치라고 합리화하면서, 보상이나 '존중' 등과 같은 전제 조건이 부응할 경우 이를 포기 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는 수순을 밟은 것 등이 모두 비슷하다. 5년전과 다른 것은 북한의 핵능력이 커진 반면, 자신들에게 훨씬 더 비우호적인 조지 부시 정권을 상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핵무기 보유국임을 선언한 만큼 포기 용의 대상이 과거 미사일에서 핵무기로 바뀌었으며, 5년전 북-미 협상팀이 서로 '적대적 의사'를 갖지 않기로 다짐했던 것과는 달리 부시 행정부는 "공격할 의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표현에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있다. ◇ 깜짝 면담 = 지난 2003년 말 발간된 올브라이트 전 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2000년 10월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했던 그녀는 "보통 이틀간의 방문이면 둘째날에 면담이 있게 마련인데, 북측 관계자들은 확실하게 얘기도 안하고 시간도 정해주지 않았다"면서 "이같은 불확실성은 이례적인 것" 이라고 술회했다. 이번 정 장관과의 면담에서도 북측은 정 장관 일행이 평양에 머무는 동안 답을 주지 않다가 평양을 뜨기 하루 전날 밤에야 면담에 동의했다. ◇ "북한도 잘못" = 김 위원장은 이번에 "남북이 서로 교류 협력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용어를 잘못 쓰고 있다"면서 "우리는 남쪽 동포나 남쪽 형제라고 하면 좋을 것을 남조선 아이들이라고 한다"고 말해 폭소를 유도했다. 그는 또 "남쪽에서도 양식을 먹고 양주를 먹고 양복을 입으면서 왜 '미국놈'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남북이 언어 순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올브라이트에게는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올바르게 교육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은 당신네 나라 사람들을 그냥 '미국인' 이라는 말 대신에 '미국놈들' 이라고 부르라고 배운다"고 말했다. ◇ 정책 합리화와 무기 포기 용의 = 김 위원장은 정 장관에게 한반도 비핵화는 고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고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북한은 핵무기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 등의 약속만 받는다면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용의를 밝힌 것이다. 5년전 김 위원장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우려하던 올브라이트에게 "외화를 위해 시리아와 이란에게 미사일을 판매하고 있다"고 공개한 뒤 "만일 미국이 보상해 준다면 미사일 프로그램은 중단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올브라이트가 "50년간에 걸친 미사일 개발 의도가 단지 외화 때문이냐"고 묻자 김 위원장은 "외화 때문만은 아니고 자위의 일부분으로 군을 무장시킨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또 "만일 남한이 5백km 사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만 한다면 우리도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다른 나라가 북한을 대신해 통신위성을 띄워주는데 동의한다면, 북한에게는 미사일이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연합뉴스) 박노황 특파원 nhpar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