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8일 국내 극장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콘스탄틴'이 걸렸다. 영화를 제작한 미국보다 열흘 이상 빨리 올려진 것이자 전세계 첫 개봉이었다. 한국의 영화 시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장가 최대의 대목인 설 연휴에 맞추자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후문이다. 앞서가는 게 영화뿐이랴. 90년대 초만 해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뭔가 사오곤 "국내엔 없는 물건"이라고 뽐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지금 그랬다간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술 옷 가방 자동차 할 것 없이 각종 유명브랜드 제품들이 현지와 동시 발매되는 건 물론 세계 혹은 아시아 최초로 나오기도 하는 까닭이다. 도요타자동차의 '렉서스 뉴 ES330'은 작년 여름 미국과 유럽보다 한달 먼저 국내 시장에 출시됐고, 지난 3월엔 병당 170만원짜리 '로얄 살루트 38년산'이 세계 최초로 국내 시장에 등장했다. 4월 말엔 화장품 브랜드 랑콤의 가정용 얼굴 필링 제품 '르쑤르파스 필'이 일본보다 먼저 선보였다. 급기야 미디어 광고를 대행하는 제니스 옵티미디어의 필립 탈보 아시아 담당 사장이 "한국은 전세계 소비 시장의 유행을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했다는 소식이다. 글로벌 마케팅의 성패를 알아볼 수 있는 테스트 마켓이라는 얘기다. 실제 한국에서 인기를 끌면 다른 나라에서도 잘 팔린다고 한다. 자동차나 주류 화장품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이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제품에 대한 수용과 반응이 다른 어느 나라 소비자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돼 제품의 효능과 가격 등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품 및 서비스 광고에 대한 의견 제시가 활발하다는 것도 꼽힌다. 모든 게 생각의 속도로 바뀐다는 시대다.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유행에 앞장서는 것도 필요할 지 모른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도 안되는 나라에서 술과 화장품 등 먹고 쓰는 부문, 그것도 값비싼 수입품 시장에서 '유행의 창' 노릇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좀 씁쓸하다. 세계 일류상품을 만드는 기술과 디자인,꼼꼼함에서 그렇다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